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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옥자>가 화제가 되고 있다. 개봉 전에는 봉준호라는 영화판의 묵직한 이름과 극장·온라인 동시 상영으로 인한 콘텐츠 유통 논란이 화제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지금 <옥자>는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대량 생산되고, 학대당하고 희생되는 동물들, 인간과 동물의 교감, 유전자 변형 식품과 소비자들의 불안심리 등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옥자>를 볼지 망설여진다. 결국은 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그 결과를 예견하니 벌써 익숙한 고통이 뱃속 깊숙한 곳에서 움찍거리기 시작한다. 봉준호 감독은 관객의 감정적 고통에 대해 추호도 자비롭지 않으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도 <옥자>는 동물의 고통에 민감한 나를 제대로 괴롭힐 것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공감은 도덕적 감정이며 이타적인 행위를 이끄는 원천이다. 전두엽에서 이루어지는 공감은 타인의 고통을 공유하고 그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게 한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과정은 분명히 공감자에게도 고통스러운 심리상태를 만든다. 아동학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는 이유이다. 공감이 이끌어내는 도덕적 행위가 완전히 이타적인 동기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고통의 공감이 만들어낸 괴로운 심리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절박함이 동기가 된다. 그만큼 고통에 대한 공감은 공감자에게 심각한 심리적 괴로움을 주기도 한다.

공감의 대상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확장되며, 인간은 동물의 감정을 공유한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인구수가 1000만명을 넘는 시대에 동물을 향한 공감의 확장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나는 지속적으로 폭로되고 있는 동물학대 글들을 읽기가 두렵다. 국제동물윤리학자협회의 펠로로서 더욱 날을 세워야 하지만, 동물이 겪는 고통에 대한 공감으로 너무나 괴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생 처음 백구가 꼬리를 흔들며 따라나선 짧은 산책길의 끝에 목이 매달려 버둥거리며 죽어가는 동영상을, 산 채로 털가죽이 벗겨져 기절했다 깨어나 고통스러워하는 너구리의 동영상을, 가슴 깃털을 쥐어뜯기는 오리들의 동영상을, 돼지 도축장에서 자행되는 비인도적이고 잔인한 도살 장면을 잠입 취재한 다큐멘터리를, 목과 다리가 잘려 상자에 넣어진 새끼 길고양이들의 사진을, 개고기의 근수를 더 나가게 하기 위해 누렁이의 목구멍에 호스를 집어넣고 2ℓ의 물을 붓는 사진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약자를 도와주고 고통에서 구해내는 사람들은 그 행동의 결과로 인해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이 많은 약자가 고통받는 것을 지속적으로 접하게 되고, 구조 행위에 제약을 받으면 공감의 저주에 갇히게 된다. 오토바이 뒤에 묶여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끌려가는 누렁이를 구조하고도 다시 그 오토바이 주인에게 돌려보내게 하는 동물법 앞에서, 쇠사슬에 앞다리가 묶여 허공에 매달린 채 학대받는 백구를 구하고도 구조자에게 절도죄가 구형되는 사법체계에서, 공감은 명백한 저주다.

혹자는 사람이 우선이니 사람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한다. 평생을 흑인, 여성, 성소수자들의 차별과 불평등에 대항해 싸워 온 인권운동가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현재 당면한 인권 문제들이 동물보호 문제를 무시하고 미루는 이유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스스로 대변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동물을 인간이 대변해 주지 않으면 동물에게 가해지는 학대와 잔인성은 더욱 가혹해질 것이기에 윤리 어젠다에 동물윤리를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다. 다행히 우리의 공감능력은 동물들의 고통을 대변할 수 있는 통로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동물윤리에 합의하고 동물보호법을 강화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동물의 고통에 대해 느끼는 공감은 좌절과 분노의 통로가 될 것이다.

근대 헌법의 토대가 된 마그나 카르타는 1215년 영국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재확인한 문서였으나, 17세기에는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근거가 되었다. 소수의 봉건귀족들을 위한 문서였던 마그나 카르타는 이렇게 확장되어 인권과 민주주의 그리고 법치의 원칙을 천명하는 상징으로 여겨진다. 마그나 카르타의 확장된 상징성에서 보이듯, 인류의 역사를 도덕적 권리와 공감의 확장으로 규정한 생명윤리학자 피터 싱어는 동물도 지각과 감각 능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보호받을 도덕적 권리를 가진다는 동물권을 제창했고, 2002년 독일은 “국가는 미래 세대의 관점에서 생명의 자연적 기반과 동물을 보호할 책임을 가진다”고 동물권을 헌법에 명시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1000만명이 넘는 인구가 반려동물과 함께 살면서 가족이라고 하지만, 이 사회에서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동물은 한낱 물건으로 정의된다. 동물권은 동물에게 참정권을 주자는 것이 아니며, 채식주의를 강요하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동물이 한 생명으로서 살아 있는 동안 고통받지 않고 죽는 순간에도 최소한의 배려를 받도록 하기 위해 동물보호를 강화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한번쯤은, 우연히 동물로 태어나 인간의 만족을 위해 단 하나뿐인 몸뚱이를 희생당한 동물에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할 필요도 있다. 한번쯤은, 식탁에서 살아 있던 동물의 살을 씹고 있다는 자각에 스스로 역겨워할 필요도 있다. 한번쯤은, 태어나서 고기가 되기까지 평생을 좁디좁은 공간에 갇혀 지내면 동물도 고통스럽다는 사실과, 물을 마시지 못하면 목이 마르고,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기면 아프다는 사실을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것에 두려움을 느낄 필요도 있다. 이러한 공감이 고통받는 동물을 구조하는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조된 한 마리가 남겨진 수천 마리가 겪는 고통의 신음을 잠재울 수 없고, 결국 공감자는 공감의 저주에 갇히고 만다. 언제까지 동물학대 문제와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개인의 희생에 떠넘기며 단편적인 미봉책으로 변죽만 울리고 있을 것인가? 동물보호법과 제도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 동물은 인간의 탐욕과 학대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 그 고통에 공감하는 나에게 이곳은 지옥이다. 그러니 동물에게 마그나 카르타를, 아니면 나의 전두엽에게 죽음을!

황금주 |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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