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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 무능의 시대다. 무능은 이제 박근혜 정부와 여야를 막론하고 오늘의 권력에 늘 따라붙는 꼬리표가 됐다. 권력을 향해 무능하다는 비판을 맘껏 할 수 있게 된 것은 6월항쟁 이후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였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 등장한 무능 프레임은 독재 시절엔 일절 꼬리를 감췄다. 민주화 이후에는 어느 정권도 무능 프레임의 공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정권 교체 여부에 따라 무능 프레임의 공격 대상도 바뀌었다. 하지만 오늘날 권력의 총체적 무능에 대한 비판은 정치적 공세라고만 보기 어렵다. ‘지금 여기’ 권력의 무능은 이념과 지역을 뛰어넘어 모두가 우려하고 분노하는 명백한 진실이 됐다.

무엇보다 박근혜 정부의 무능이 심각하다.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불거진 인사파동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인사파동보다 무서운 건 정부의 무능이 국가가 마땅히 보호해야 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도리어 위협하는 사태를 낳고 있는 현실이다. 1년 전 세월호 참사를 겪은 국민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이제껏 답을 얻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세월호 진상 규명을 가로막는 시행령 개정이 청와대의 반대로 멈춰선 지금, 갑자기 들이닥친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라는 역병에 정부는 해결 능력이 없다는 의미의 ‘무능’을 넘어 아예 아무것도 못한다는 뜻의 ‘불능’ 상태임을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에 보여줬다. 국민은 또다시 국가의 역할을 물으며 망연자실할 뿐이다.

한국 땅에 민주주의의 홀씨가 날아다니던 19세기 말 개화파인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국가는 인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전염병이 유행할 때 정부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병자가 탈 차를 마련하여 호송하여 격리하고, 그 차에 소독약을 뿌려 지나는 길에 더러운 기운이 퍼지지 않게 한다.’ 격리와 방역을 명시한 명쾌하고도 간명한 매뉴얼을 2015년의 대한민국 정부는 처음부터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초동 방역에 실패하고 메르스가 아닌 ‘코르스’라는 전염병의 역사를 창조하고 있다. 중동에서 날아온 메르스는 더 이상 교본 역할을 못하고 있다. 예측불가한 ‘코르스’의 뒤를 쫓기에 급급하다. 지금 우리는 국가의 무능이 대한민국을 순식간에 미개와 야만의 상태로 몰아버린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살아내고 있다.

왜 권력은 이토록 무능한 걸까. 우리에겐 산업화와 민주화의 동시 달성이라는 위업을 쌓은 70년의 역사가 있다. 이 과거의 영광이 오늘의 권력에게 독이 되고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고 경제성장을 이룩했다는 자아도취와 우월의식에 오만이 하늘을 찌른다. 그들에게서 국가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권력의 책무를 번민하는 모습을 찾기 어렵다.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이 상징하듯이, 권력의 유지와 탈환에 급급할 뿐이다.

과거의 치적에 기댄 오늘의 권력에겐 내일도 없다. 미래에 대해 지독히 무관심하고 무지하다. 아니, 그저 장밋빛일 거라 무조건 믿는다. 미국의 사회평론가인 웬델 베리는 <지식의 역습>에서 무지에서 나온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을 경고한다. ‘인간은 미래를 내다보고 장기적인 결과를 예측할 능력이 있다고 확신한다. 첨단 기술 시대에 인류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거나 곧 알게 될 것이라고 공언한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오만과 무지 속에 살아간다면 미래의 지속가능한 삶을 보장할 수 없다’고 일갈한다.

권력은 이러한 우울한 미래 예측을 반기지 않는다. 눈앞에 닥친 저성장 시대의 도래도 애써 외면한다. 오직 앞만 보고 달려왔던 지난 70년의 영광을 미래에도 재현할 수 있다는 청사진만 제시한다. 메르스의 경고에도 국민이 지나치게 호들갑을 떤다며 현실마저 외면하려 든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권력의 무지가 정보 부족과 사태에 대한 판단 미숙을 낳고 이것이 곧 미숙한 정책 결정으로 이어지는 혼돈을 목도하고 있다.

15일 대통령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모두발언을 하고있다. (출처 : 경향DB)


이제 우리 앞에 놓인 미래는 과거의 위업을 에너지로 오늘을 부지런히 달리면 무사히 도착할 수 있는 지상낙원이 아니다. 메르스의 비극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로부터 받은 경고장이다. 과거에 기댄 오만과 미래에 대한 무지는 오늘의 독선과 아집을 낳는다. 독선과 아집은 부적절한 처신과 정치적 오판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오만과 무지라는 갑옷으로 무장한 권력은 결코 무능의 덫을 빠져나올 수 없다. 불능권력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김정인 | 춘천교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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