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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에 대한 문제 제기가 계속되지만, 청와대는 임명을 강행했고 본인은 소셜미디어를 통한 짤막한 사과 이후 침묵을 이어가고 있다. ‘탁현민 퇴출’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확산되고 더불어민주당 여성의원들도 비판적 의견을 청와대에 전달했지만, 어떤 조치가 취해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탁씨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표명한 민주당 여성의원들이나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계에 비난이 쏟아지기도 한다.

탁씨에 대한 반대를 그저 딴지걸기, ‘문재인 정부 흔들기’로 매도해선 안 된다. 반대의견을 허용하지 않는 정치문화는 파시즘이다. 탁씨를 비판하는 이들 다수는 문 대통령과 새 정부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우리 사회의 진일보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청와대가 성평등에 역행하는 인사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우려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여야 여성 의원들은 물론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에서도 사퇴를 촉구하는 성명을 내는 등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에 대한 사퇴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3월, 문재인 대통령 출마선언 행사에서 현장 지휘를 하는 탁 행정관의 모습. 연합뉴스

탁씨에 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며칠 전엔 그의 과거 ‘성매매 찬양’ 발언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상상력에 권력을>이라는 책에서 그가 성매매 업소들을 “동방예의지국의 아름다운 풍경” 등으로 기술한 내용은, 청와대 관계자가 해명했듯 우리 사회의 저급한 성문화를 조롱하는 “반어법”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성매매 산업에 대한 비평적 통찰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그가 다른 책들에서 (허풍일 수도 있는) 자기 경험을 토대로 무책임한 여성비하적 성관념을 자랑처럼 공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찰적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책임은 그의 몫이며, 청와대가 해명한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어느 칼럼은, “성과 섹스에 대한 공격을 받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탁씨를 옹호했다. 그를 문제 삼는다면 흠 잡히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말인데, 이는 그가 표현했던 정도의 성관념을 대한민국 남성들이 널리 공유한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바로 그래서 탁씨의 문제는 징후적이다. 그의 책 내용 및 그에 대한 옹호가 대한민국의 성평등 지수를 드러내는 일종의 증상이라면, 그에 대한 청와대와 일부 남성들의 편들기는 우리 사회의 권력이 얼마나 남성중심적인지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증상이다.

탁씨의 성관념은 무엇보다도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문제다.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 사고는 폭력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실제로, 데이트 폭력은 신고된 것만도 연간 7000건, 연인에게 살해당한 피해자는 2011년부터 2015년까지 233명, 살인미수 피해자만도 309명. 피해자는 거의 모두 여성이다. ‘잠재적 가해자’로 여겨지는 경험이 불쾌하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은 탁씨 유(類)의 성관념이 용인되지 않게 만드는 노력에 동참해야 한다.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청와대의 인선은 말할 것도 없다.

중앙정부가 여성혐오와 남성중심적 성관념을 용인하는 남성연대의 구태에 머무른다면, 그러한 조직이 가시화하는 권력은 국민의 절반인 여성을 구조적으로 소외시킨다. 남성연대의 기반 위에서 작동하면서 다시 남성연대를 공고히 하는 권력의 순환작용은 시민으로서 여성의 존재를 온전히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혁명은 보편의 논리를 내세워 대의를 위해 차이를 잊으라고 요구하지만, 대의를 이룬 후의 권력은 남성중심의 구조로 재빨리 회귀한다. 386세대의 막내격인 나는 80년대 민주화 투쟁 이후 지금까지 혁명의 주체를 자임한 남성연대가 스스로를 본격적으로 비판하고 재구성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함께 촛불을 들었으나 새 정부를 출범시킨 촛불의 주체로 온전히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익숙한 상처다. 하지만 익숙하기 때문에 더 아프고, 이 정부가 다른 정부와는 다를 것을 절실히 희망하기에 더욱 그렇다.

19세기 후반 존 스튜어트 밀은 가부장적 결혼제도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남편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해도 가부장제가 그에게 부여하는 권력의 구조적 부당함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었다. 법조인, 정치인으로서 문 대통령의 이력, 대통령 취임 후의 소통과 탈권위주의의 행보는, 그가 얼마나 보기 드문 인격의 소유자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대통령 개인이 아무리 훌륭한 인격을 갖춘 페미니스트라 해도, 그가 선출직 공무원으로서 행사하는 권력이 암묵적으로 여성비하를 용인하고 여성을 소외시키는 남성연대에 기대는 것이라면, 이 정부에서 성평등은 이루어질 수 없다. 성평등 없이 민주주의가 가능한가. 예외적 여성들의 능력을 인정하여 유리천장을 깨는 가시적 조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권력의 남성편향성을 재조직하여 일상의 차원에서 보통 여성들이 동등한 정치적 주체, 주권적 시민임을 실감할 수 있도록 남성연대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키는 노력이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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