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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의 권력은 막강하다. 현대 사회에서 합법적으로 타인의 인신을 구속할 수 있는 권한은 오로지 사법부와 의료인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최근 정신보건법 개정으로 절차가 까다로워지기는 했지만, 정신과 전문의는 환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환자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의료의 권력이 정신병원 강제입원 같은 특수한 상황에만 행사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의 의료 이용 전반에 걸쳐 행사되고 있다.

 

의료의 권력이 보편적으로 확립된 것은 20세기 초 이후에 형성된 현상이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의료 이용의 중심 공간은 병원이 아니었다. 빈민층은 수용소와 다름없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중산층 이상의 환자는 의료인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서 치료를 받았다. 의료인이 환자를 통제할 수 있는 여지는 매우 적었다. 그러나 의료기기와 기술이 발전하고 의료조직이 체계화되면서 병원이 의료 이용의 중심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됐고, 중산층 이상의 환자도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게 됐다. 병원이라는 통제된 공간에서 의료인은 환자의 일거수일투족에 개입할 수 있게 됐다. 의료인은 지시하고 환자는 따라야 하는 고전적인 의사·환자 관계는 점차 문화로 굳어졌다. 이런 관계는 법에도 반영되어 있다. ‘보건의료기본법’은 모든 국민은 보건의료인의 정당한 지도에 협조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질병을 잘 치료해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일반적인 상거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소비자 의무 조항이다.

 

국민의당 이용주 의원이 14일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국정조사특별위원회 3차 청문회에서 피멍 자국이 있는 박근혜 대통령 얼굴 사진을 들고 미용 시술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국가권력은 면허 제도를 통해 의료의 권력을 배타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면허가 없거나, 면허 범위를 벗어난 일체의 의료 행위는 불법으로 간주되어서 처벌받는다. 고 백남기 선생의 사망진단서 논란에서도 확인한 바와 같이, 모든 의사가 아니라고 해도 주치의가 그렇다고 하면 그 누구도 해당 환자의 사망진단서에 손을 댈 수가 없다. 현대사회에서 타인의 몸에 칼을 대고도 처벌받지 않는 이는 의료인이 유일하다.

 

의료의 권력은 천부적인 것이 아니다. 근대 의료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고,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일종의 공적 권력이다. 그런 만큼 의료인은 높은 책임성과 윤리성을 요구받는다. 일부 의료인은 왜 우리에게 일반인보다 더 엄격한 이중 잣대를 들이대느냐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한다. 더 높은 책임성과 윤리성을 거부한다면 의료의 배타적 권력은 존립 근거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런 만큼 책임성과 윤리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의료인 스스로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러나 사망진단서 논란부터 ‘박근혜 의료 게이트’에 이르는 일련의 사태에서 일부 의료인이 보인 모습은 이런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망진단서 논란은 권력화된 의료의 힘을 실감하게 했다. 권력과 가까운 의료인과 병원에 주어진 각종 특혜 의혹은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정경유착과 판박이처럼 닮아 있다. 아직 진상이 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진료기록 조작과 위증이 사실이라면 이것 역시 의료인의 책임성과 윤리성을 전적으로 위배한 것이다. 환자의 정보보호라는 의료인의 의무 조항이 진료기록 폐기와 조작을 감추는 방패막이로 악용하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의료인이 보인 모습은 대다수 의료인의 정서와도 동떨어진 것이었다. 의료계의 대표 단체인 대한의사협회는 사망진단서 논란 초기에 백남기 선생의 사인은 외인사라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한 대다수 의료인의 분노도 일반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대한전공의협의회 소속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은 촛불집회 내내 광화문에 진료소를 차려서 촛불시민을 진료했다. 그러나 연이어 터져 나온 의료 게이트 파문은 의료인들의 이런 노력을 무색하게 했다.

 

권력에 유착된 의료는 국민으로 하여금 의료인의 책임성과 윤리성을 의심하게 했고, 최고 권력자가 누린 독특한 ‘웰빙 의료’는 정권의 정당성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대통령이라고 미용시술을 하지 말고, 각종 주사제를 맞지 말란 법은 없다. 우리나라 국민이 그런 것을 가지고 트집 잡을 정도로 야박하지는 않다. 그러나 정도껏 해야 했다. 때와 장소를 가리는 눈치는 있어야 했다. 대통령에게 특별한 의료를 보장하는 이유는 그가 국민의 안위를 책임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안위를 제쳐놓고 웰빙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번 사태에서 권력에 유착된 의료와 권력자의 독특한 웰빙 의료는 한 몸이었다. 국민은 독특한 웰빙 의료를 누리던 권력자로부터 권력을 거두어들였다. 권력에 유착된 의료가 다시 기승을 부리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것은 상식 있는 의료인들이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해야 할 일이다.

 

이진석 서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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