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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유학생 시절, 영어가 서툴러도 즐길 수 있던 유일한 낙은 스포츠 중계 시청이었다. 생소한 미식축구도 중계를 보면서 규칙과 선수들 이름을 익혀 나갔다. 어느 날, 미식축구 최고의 수비수로 이름을 날리다가 은퇴한 한 선수가 스포츠 뉴스가 아닌 일반 뉴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주(州) 대법관이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곧이어 그는 부대법원장이 되었다. 올스타에 해당하는 ‘프로볼’을 아홉 차례 받고 시즌 최우수선수상(MVP)도 받은 적도 있던 앨런 페이지였다. 그는 20년 이상 부대법원장을 역임하다가 2015년에 은퇴했다.

운동선수는 은퇴하면 당연히 코치나 감독이 되는 줄만 알았던 한국인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좀 더 지내다보니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1990년대 최고의 쿼터백 중 하나였던 스티브 영은 변호사가 되었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인 에미 차우는 스탠퍼드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전설적인 야구 감독 토니 라루사는 이미 변호사 시험까지 합격한 상태에서 마이너리그 감독 일을 시작했다. 로랑 두버네이-타디프라는 미식축구 선수는 작년에 의대를 졸업하고 최초의 현직 의사 선수가 되었다. 소속 팀과 5년 475억원의 초대형 연봉 계약을 마친 직후의 일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긴 하다. 세계 랭킹 50위권까지 오르며 한국 테니스의 간판으로 활약하던 박성희씨는 은퇴 후 대학공부부터 시작해 영국에서 스포츠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강의와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한 매체는 국가대표 수영선수 출신의 미국 변호사 장희진씨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이에 따르면, 장씨는 당시 중학생으로서 “기말고사 공부를 해야 하니” 태릉선수촌 입촌을 미뤄달라고 요청했다가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한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은 했지만) 공부와 수영을 병행하기 위해 유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로스쿨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한국 국가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박성희씨도 “공부가 하고 싶어서” 비교적 일찍 은퇴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는 최고 클래스의 운동선수가 틈틈이 법대와 의대를 다니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왜 공부와 운동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는 걸까? 심지어 대한체육회를 이끌던 박용성 회장조차 2009년 “중학교까지의 의무교육을 받은 이후에는 운동을 할지, 공부를 할지 학생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시대착오적 주장을 한 매체 기고를 통해 한 바 있다.

운동선수가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은퇴 후 그럴듯한 직업을 갖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승리를 위해, 금메달을 위해 병기처럼 다뤄지는 세계에서 벗어나 교양과 인권을 습득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이다. 선수촌과 합숙의 목표는 조련이지 교육이 아니기 때문이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는 조재범 전 코치의 성폭행을 고발했다. 유도선수 신유용도 미성년자 때부터 오랜 기간 성폭행을 당했다며 전 코치를 고소했다. ‘영미팀’은 컬링계의 불합리와 몰상식을 폭로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공기업의 여자축구 감독이 소속 선수를 지속적으로 성폭행하여 해임된 바 있고, 역도 금메달리스트가 후배에게 전치 6주의 상해를 입힌 적도 있었다. 국가대표 배구 코치가 전년도 프로배구 MVP 선수의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무차별 폭행을 한 사건이 있었고, 여자농구팀 감독이 전지훈련지에서 소속 선수를 성추행한 혐의로 구속된 적도 있었다.

심석희·신유용 선수의 절규를 그저 ‘체육계 미투’로 남겨놓지 않았으면 한다.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문제가 “여기에도 있더라”라는 정도의 인상을 줄까 걱정이다. 또 잠깐 떠들다가 유야무야되고 피해자만 떠나는 일이 반복될까 두렵다. 선수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던 이상렬 전 코치는 지금 TV에서 배구 해설을 하고 있고, 당시의 책임자였던 김호철 감독은 지금도 국가대표 감독이다. 여자쇼트트랙 상습 폭행 사건의 중심에 있던 김소희 전 코치는 현재 대한체육회 여성 체육위원이다. 최근 사건의 책임 꼭대기에 있어야 할 이기흥 회장과 전명규 교수는 서로 진실 공방만 벌이고 있다. 지금껏 (성)폭행으로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은 체육인이 과연 몇이나 있는가.

미국 체육계도 깨끗하진 않다. 간혹 폭력감독이 등장하기도 하고 성추행 뉴스도 나온다. 하지만 멱살을 잡은 정도의 물리력을 행사했던 감독은 단칼에 잘리고, 치료를 핑계로 30년 동안 성폭행·성추행해온 팀 닥터에게는 175년의 징역형을 내렸다. 최근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과 도종환 문체부 장관이 각각 기자회견을 열고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을 천명했다. 체육계는 별로 믿지 않는 눈치다.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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