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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산책자]걷는 인간

opinionX 2019. 1. 28. 14:48

주말마다 서울 시내를 걷고 있다. 편집자인 내가 주말에조차 책을 읽는다는 건 다른 이들이 주말에도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침에 집을 나와 합정역에 차를 대놓고 내처 걷기 시작한다. 목적지는 없고 종로, 신림, 한남동 이런 식으로 방향을 잡는다. 골목이 보이면 저긴 뭐가 있을까 호기심에 차서 들어가고, 길을 잃으면 오히려 다행이다 싶을 만큼 미로를 헤맨다. 8시간쯤 걷는데, 거리로 따지면 25㎞ 전후이고 걸음수로 3만보가 넘는다.

늘 드나들던 서울이지만 찻길을 벗어나면 못 가본 곳 천지다. 한 번도 발 디뎌본 적 없는 공간에 두 발을 딛고 공기를 들이마신다. 이것이 주는 즐거움은 크다. 서울 시내에는 스타벅스만 많은 게 아니라 시장도 많다. 종로의 방산시장과 중부건어물시장은 이번에 처음 가봤다. 거대한 규모로 도열한 굴비와 그 가공 현장은 여기가 법성포인가 싶을 정도였다. 종로서적이 사라지고 그 많던 극장도 없어지면서 머릿속의 종로는 노인들의 공간으로 이미지화되었는데 이번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춥지 않아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그래도 겨울이라서 볕을 따라서 걷는데 이것도 큰 즐거움이다. 볕이 길게 이어진 구역을 발견하면 노다지를 만난 기분이 들고 얼굴과 등판이 볕으로 따뜻해짐을 느끼면 스멀스멀 행복감이 번지기도 한다. 주말 오전의 도시는 한 주를 치열하게 보내고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상태다. 그 한적함이 내게도 전염되어 온다.

이번에 걸으면서 계속 신기한 대목은 길이 끊이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길은 늘 사방팔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어깨를 움츠릴 정도로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집이나 상가가 그물망을 이루고 있는 곳에서는 길의 생김새가 더 다양해지고 기발해졌다. 막다른 곳은 없었다. 새삼 인간이란 종족은 집을 짓고 길을 만들면서 문명을 넓혀 왔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길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차가 다니는 길로 나뉜다. 사람은 두 발로 걷고 차는 바퀴를 굴려서 나아간다. 신호등에 멈춰선 차들을 유심히 보게 되었는데 멎어 있던 바퀴가 햇살을 뿌리며 회전하는 모습이 경이롭게 다가왔다. 저 회전력이 세상을 이렇게 바꿔놓았구나. 바퀴를 돌리는 힘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지만 바퀴는 힘차고 부드럽게 돌아갔다. 뼈와 근육으로 움직이는 인간의 두 다리는 한쪽 다리가 앞으로 뻗을 때 다른 쪽 다리는 뒤로 뻗는다. 그 차이가 새삼스러웠다.

강도 건너고 산도 넘는다. 지난주엔 양화대교를 건너 문래동 공단으로 넘어갔다. 이번 주엔 한남동에서 남산을 넘어서 을지로로 왔다. 을지로엔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꽤 보였다. 재개발지역으로 발표됐다가 서울시장의 결정으로 연말까지 전면 보류된 이곳은 요즘 세간의 관심이 집중돼 있다. 공구상 사이사이에 을지면옥, 양미옥 등 노포가 많다. 처음 가보는 오복식당에서 동태찌개를 사 먹었다. 하루 종일 걷다가 먹는 밥이니 당연히 꿀맛이다. 큰 국물멸치를 내장도 떼지 않고 기름에 살짝 볶은 밑반찬이 인상적이었고 꾸덕꾸덕 발효된 코다리의 살맛은 을지로의 눅눅한 공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30대로 보이는 아들이 서빙을 도우면서 주방일을 하는 어머니에게 틈틈이 영어 공부 앱을 설명해주는 모습 또한 다정했다. 어머니는 “이 나이에 잉글리쉬라니” 하셨는데 그런 변화가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식당을 나와 지하철로 향하는데 골목에 세숫대야를 내놓고 손을 씻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쭈그려 앉아 팔에 비누칠을 하는 모습은 어쩐지 그 자체로 하나의 생활유산이 아닐까 싶었다. 기름밥 먹는 이들이 퇴근 전 다 저렇게 씻지 않았겠는가, 이 골목에 얼마나 많은 세숫대야가 나왔겠는가.

지지난주 세운상가에 갔을 때도 생각났다. 허름한 칼국숫집에 들어가 주문하고 앉았는데 예순쯤 돼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젊을 때 세운상가에서 일을 한 모양이었다. 식당 주인에게 “예전엔 매일 여기서 밥을 먹었다”며 “장사를 몇 년 하셨냐”고 물었다. 식당 주인이 1993년이라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감회에 젖어 칼국수를 먹었다.

복합몰에 가게들을 몰아넣는 것, 유명인을 내세운 프랜차이즈,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파트! 이 세 가지는 도시를 재미없게 바꿔놓고 있다. 우린 이 셋을 피해 다녔지만 피하는 게 불가능했다. 안락함의 이면에 도사린 도시경관적 비극만은 아닐 것이다. 소중한 걸 너무 쉽게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마음이 간절해졌다. 좀 더 머리를 쓰고 이리저리 궁리를 해봤으면 좋겠다. 아들에게 영어 공부 앱을 배우는 어머니처럼 말이다. 어쨌든 다음주도 우리는 걸을 것이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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