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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이 넘는 수강생들 중에서 늘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그 여학생이 내 연구실 문을 두드린 것은 어느 화창한 봄날 오후였다. 내가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제대로 기억해준 교수라는 말에 차마 내 먼 친척과 동명이인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흔한 이야기들, 시험과 취업에 연거푸 실패하고 어느덧 졸업을 더 이상 유예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는데, 부모님과 주변의 기대는 부담스럽기만 하고 어디서 길을 잃었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그 나이에는 누구나 힘들다는 말, 조금만 참으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릴 때부터 모범생이었을 것이고 늘 앞만 보고 달려왔을 그 여학생이 지금껏 열심히 살았으니 정당하고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선생으로서, 기성세대로서 해주고 싶었다. 아니면, ‘실패는 청춘의 특권’이라는 식상한 말로라도 위로를 해주고 잃어버린 길을 곧 찾을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임을 나는 안다. 우리의 청년들은 청춘을 잃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의 근현대사는 젊은이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쓰인 역사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 근대국가 건설에 앞장섰던 것도, 한국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공동체를 일으킨 것도 젊은이들이었다. 4·19에서 87년에 이르는 민주화의 여정에서 피 흘린 것도 꽃다운 청춘들이었고,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흘린 땀도, 외환위기의 고통도 청춘들의 몫이었다. 요컨대, 이제는 기성세대가 된 왕년의 청춘들은 각자의 신화를 간직하고 살고 있으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현재에 나름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기성세대들은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청춘을 구가하며 동시에 독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청춘’이라는 말이 더 이상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중노년층을 서술하는 말이 된 지는 오래다.

그 여학생은 큰 꿈과 큰 뜻을 가지라는 말이 제일 듣기 싫고 자기의 꿈은 그저 평탄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럴 것이다. 기성세대들을 호명하고 이들의 어깨에 지워졌던 크나큰 역사적 과제와 책무들이 이제는 남아 있지도 유효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기성세대들의 경제적·정치적 지분 또한 오롯이 그들만의 몫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여학생이 취업에 성공한다고 해도 서울에 집 하나 장만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며, 이제서야 40년 뒤늦게 중동을 다녀온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학자 김홍중처럼 이들을 ‘생존세대’라 불러야 할지 모른다.

결정적으로 비관적인 사실은 청년층의 경제적 곤란과 정치적 소외가 상호작용하는 악순환의 과정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정치권은, 예를 들어, 이제 청년층의 정치적 향배에 예전처럼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1980년대에 전체 유권자의 35%에 육박하던 20대가 이제는 그 절반도 채 되지 않으며, 이들의 정치적 참여는 매우 저조하기 때문이다. 정부 여당이 노골적으로 집값 상승을 부추기는 일관된 경제정책을 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며, 그 결과로서 청년층의 경제적 상황은 물론 더 악화될 것이다. 미래의 전망이 막혀 있는 이러한 공동체에서 청년들이 투표나 청원 등의 ‘관습적 참여’가 아니라 시위나 온라인 활동 등의 대안을 찾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것은 이들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약화시킬 따름이다.

새누리당 김무성대표가 청년층과 만나는 청년무대를 이어가기 위해 25일 서울 한양대학교를 방문하자 한국청년연대, 알바노조, 신림동고시촌1인거주청년들 회원들이 여당의 청년 정책을 비난하며 김대표에게 항의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그 여학생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 하기가 이토록 어려웠던 것처럼 청년문제는 손쉬운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몇 가지 고민해야 할 원칙들을 생각해보고 해결의 실마리를 차근차근 풀어가야 할 것이다. 첫째, 현재의 청년문제가 잠시 홍역처럼 앓고 지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정말 심각한 문제임을 직시할 것. 이는 유례없는 100만명의 청년 실업자들이 겪는 고통이 사회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둘째, 정부나 정치권은 청년의 고용, 주택, 결혼, 양육, 복지 등의 문제를 선거의 관점에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 문제로 인정하고 머리를 맞대고 토론할 것. 싫건 좋건 청년들은 내일의 기성세대가 되어 오늘의 기성세대를 부양하게 될 것이고 이들의 행복과 안녕이 우리 공동체의 존속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청년들은 공동체의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정치적 소외와 경제적 절망의 악순환을 끊을 것. 넷째, 기업과 사회는 청년들이 보다 나은 교육을 받고 자기 성찰과 준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조금만 기다려줄 것. 잃어버린 청춘과 봄을 누릴 수 있도록 조금만 기다려줄 것.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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