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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거치면서 대구·경북은 두 명의 정치지도자를 잃었다. 더불어민주당 김부겸은 떨어졌고, 미래통합당 유승민은 출마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마지막 인사가 가슴을 적신다. 김부겸이 울먹이는 지지자들을 다독인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몇 주 후, 유승민이 아쉬운 표정으로 전통시장을 돈다. “자랑스러운 대구의 아들로 남겠습니다.” 둘 다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은 지역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사랑하겠다는 얘기다. 정치인의 그저 그런 인사말로 치부하기에는 마음이 짠하다. 두 사람은 그저 그런 정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부겸이 어느 해인가 지역주의와 맞서겠다며 경기도 군포에서 대구로 왔을 때, 모두 무모한 도전이라 했다.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지역주의라는 유령 앞에는 ‘국회의원 내리 3선을 미련 없이 버리고 험지 고향으로 왔다’는 제법 그럴듯한 서사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선거에서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20대 총선에선 성공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이번 선거에서 김부겸은 다시 패배하고 말았다. 

유승민의 정치가 빛나기 시작한 것은 국회 원내대표 때 연설부터였다. 따뜻한 보수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려면 세금을 올려야 하며,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했다. 유승민은 이 연설로 보수본진과 정면충돌했고, 그 길로 내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까지 가담하였다. 그와 대구·경북의 불화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대구·경북은 그의 이마에 배신자라는 주홍글씨를 새겼다.

대구·경북은 진보, 보수 진영에서 개혁의 깃발을 든 두 지도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부겸을 떠밀어낸 것은 지역주의였다. 양적 지표로 보면 대구·경북에서 지역주의가 약화되고 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더욱 구조화되고 있다. 지역주의는 처음 ‘감정의 동원’에서 시작하여 ‘정당일체감의 형성’으로 나아가더니 지금은 ‘이념의 내면화’로 구조화되고 있다. 이로써 대구·경북에서 민주당을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른바 논리와 가치로 뒷받침되고 있다. ‘보수를 지키기 위해서 김부겸을 떨어뜨려야 했다’는 이번 선거에 대한 대구·경북 자신의 설명이 그 증거다.

유승민의 무릎을 꿇게 한 것은 신화였다. 박정희 신화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박정희의 신전에서 걸어 나온 신의 딸이 유승민을 비바람 부는 들판으로 내몰았다. 대구·경북에서 유승민은 김부겸보다 더 힘들어보이기도 했다. 유승민의 싸움은 신탁(神託)에 맞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신화의 영역에는 오로지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있을 뿐이다. 촛불혁명, 탄핵 결정, 전직 대통령의 구속, 연이은 선거 패배에도 불구하고 대구·경북은 ‘탄핵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다. 대구·경북에서 신탁은 여전히 살아있고 그것을 거스르는 일은 금기이다.

김부겸과 유승민은 다른 듯 닮았다. 두 사람은 ‘보수의 심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정치인은 온갖 좌절과 모욕, 분노를 삼켜야 한다는데,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늠름해 보인다. ‘이별은 아니라는’ 두 사람의 작별인사는 촉촉했지만 옹글었다. 김부겸은 “상처투성이 노무현을 생각하며 영남의 보수 일당체제를 깨기 위해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유승민은 “어디에 있든 사림(士林)의 피를 이어받아 나라의 미래를 개척하는 개혁의 길을 걷겠다”고 결의했다. 노무현정신이나 사림정신이란 올곧은 소신의 표상이다. 두 사람은, 고향에서 쏟아지는 조롱 따위는 이미 삼켜버린 것 같다.

‘고향에서 버림받은’ 진보개혁 정치인 김부겸과 보수개혁 정치인 유승민이 운기조식(運氣調息)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두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은 서두를 필요가 없겠다.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깃발을 추스르는 것이 우선으로 보인다. 고향에서 버림받은 사람은 모름지기 대처에서 커서 돌아오는 법이다. 당 대표에 도전하든지, 대선 후보에 오르든지, 더 큰 과제를 가진, 내로라하는 모습으로 귀향하는 것이 좋겠다. 두 개혁정치인을 버린 대구·경북에는 그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 두 사람을 보내놓고 돌아서서 아쉽다는 얘기도 하는 모양인데, 그 말에 솔깃하면 또 희롱을 당하게 될 것이다. 동토(凍土) 대구·경북의 변화는 아무래도 나라 전체의 변화를 통해 이룰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번 총선에서 표표히 사라진 김부겸과 유승민이 성공한 개혁의 깃발을 들고 어느 날 홀연히 고향에 나타나는 모습을 생각한다. 즐거운 상상이다.

<김태일 |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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