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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과히 정갈하지 않은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다가 곰팡이에 된서리를 맞은 적이 있었다. 두피에 마늘즙이나 식초를 바른다거나 백열전등으로 지진다거나 하는 민간요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곰팡이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내 기억에 곰팡이는 ‘강한 적’이었다. 지구상에는 약 150만종의 곰팡이가 있다고 한다. 엄청난 숫자다. 그중 식물에 쉽게 침입하는 곰팡이는 27만종, 곤충에는 5만종 정도가 있다고 한다. 반면 포유동물에 질병을 일으키는 곰팡이의 숫자는 수백 종에 불과하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런 차이는 왜 생겨났을까? 우선 쉽게 면역계를 그 원인으로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면역계 외에도 포유동물은 곰팡이와 맞설 그럴싸한 나름의 전략을 수립했다. 바로 체온을 올리는 일이었다. 뉴욕 앨버트 아인슈타인 대학 카사드발 교수는 포유류가 섭씨 30~40도 사이에서 체온을 1도씩 올릴 때마다 곰팡이의 침입을 6%씩 저지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렇듯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은 에너지 예산 면에서 보자면 꽤나 소비적이지만 최소한 곰팡이를 퇴치하는 데는 안성맞춤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러면 곰팡이 퇴치 외에 정온성의 다른 이점은 없을까? 캘리포니아 대학 앨버트 베넷과 오리건 대학 존 루벤은 정온동물과 변온동물의 가장 큰 차이가 지구력에 있다고 보았다. 먹이를 쫓아가는 사자와 물속에서 눈만 내놓고 먹잇감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악어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이해될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포유동물과 닭 따위의 조류는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정온동물로 자신을 무장함으로써 살아가는 장소를 추운 곳까지 확장하고 근육을 빠르게 움직여 먹이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온도가 10도 올라갈 때 근육의 움직임이나 효소의 활성이 두 배로 증가한다는 점은 잘 알려진 생리학적 법칙이다. 물론 50도를 넘어가면 세포 일꾼인 단백질의 변성이 시작되므로 정온동물의 체온은 40도 근처에서 최적화된다. 근육에는 이동하는 데 쓰이는 가로무늬근도 있지만 소화기관이나 혈관을 움직이는 민무늬근도 있다. 정온성을 가진 생명체는 밤낮 할 것 없이 심장, 간을 포함한 소화기관 및 콩팥의 기능을 완벽하게 유지한다. 심장이 혈액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빠른 속도로 운반하는 동안 콩팥은 질소 노폐물을 몸 밖으로 신속하게 내보낸다. 흡수를 마친 소화기관은 간으로 영양소를 빠짐없이 보낸다. 정온동물 신체 기관의 이런 여러 장점들을 한데 모아보면 모든 생명체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정온성에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정온성을 선택한 동물은 전체 동물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 150만 중에 조류 9000종, 포유동물 4500종을 제외한 나머지 99.9%의 동물은 주변 환경에 따라 체온이 변하는 변온성을 채택했다.

이렇게 보면 정온성은 생명체 진화 전 과정에서 극히 예외적인 드라마에 속한다. 그렇다면 일부 동물계에서 정온성은 어떻게 자리 잡게 되었을까? 과연 파충류인 공룡의 피는 차갑기만 했을까? 공룡을 연구한 최근 결과를 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큰 육상 동물이었던 용반목(Sauropod) 공룡은 풀을 먹었다고 한다. 초식동물들이 흔히 겪는 문제는 탄소에 비해 질소의 섭취량이 적다는 점이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충분한 양의 질소를 섭취하려면 동물은 상대적으로 탄소가 풍부한 풀을 많이 먹어야 한다. 잠을 줄이면서까지 풀을 먹은 결과 동물의 몸에는 탄소가 과도하게 축적되었다. 이 축적된 탄소를 처리하기 위해 공룡들이 취한 방식은 두 가지였는데 그 하나는 몸집을 키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탄소를 태워서 열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연구를 주도한 리버풀의 존 무어스 대학 윌킨슨 박사는 체중에 비해 표면적이 상대적으로 넓은 몸집의 공룡 새끼들이 열을 내면서 탄소를 처리했다면 생존에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탄소를 태워 열을 내는 대사 체계가 야행성 포유류에서도 시작되었으리라고 과학자들은 짐작한다. 우리는 정온성이 포유동물과 조류에 국한해서 진화되었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생애 어느 순간 잠깐이라도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생명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어류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참치, 황새치, 악상어가 열을 내면서 빠르게 몸을 움직이고 눈 주변의 근육을 움직여 먹잇감을 정확히 포착한다. 비단뱀도 알을 낳고 부화하는 동안 몸의 열을 내 자신의 분신을 보호하려 든다. 심지어 식물도 생식하는 동안 에너지를 써서 열을 낸다. 바로 수분에 참여할 곤충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손난로’ 전략이다. 딱정벌레는 온도가 40도가 넘는 천남성과 식물들의 꽃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씨를 성숙시키기 위해 연꽃도 열을 낸다.

경칩 지난 절기에 눈이 쌓인 산길을 걷다 마주치는 복수초(福壽草) 노란 꽃이나 변산 바람꽃도 열을 내 눈을 녹이고 안온하게 자리 잡는다. 남들보다 일찍 수분을 마치고 씨를 만들어 살아남기 위한 안간힘을 보고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하루 꼬박 세끼를 먹고 100년을 향해 산다고 하는 인간은 무슨 아름다움을 바라 하루 종일 열을 낼까? 2018년 한국의 봄날, 쑥이며 민들레 앉은뱅이 풀들이 앞 다투어 돋을새김으로 고개를 내민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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