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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여섯점 차이 났다고
끝난 경기로 봐야 하나
가장 중요한 불문율은
응원하는 팬 존중하는 것


우리는 왜 스포츠에 열광하는가. 인생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길고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정황에 처해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다. 어떤 일은 분명히 내 실수였다, 내 탓이다,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분명치 않다. 왜 내 보고서가 묵살되었는지, 왜 내가 야박한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왜 나에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언제나 길고도 불투명한 고립과 고통인지 알기 어렵다.

세월호 참사 당시 아이들을 구하다가 죽음에 이른 선생님들. 그 중에 몇 분은, 인사혁신처의 순직심사위원회에 따르면, ‘기간제 교사’라서 순직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왜? 도대체 왜? 이제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분을 감안해 행동해야 하는가. 온갖 비리로 얼룩진 육·해·공의 군 수뇌부들은 이 사회가 완전히 뒤집힌, 모든 가치가 뒤집힌, 사회임을 말해준다. 반면 스포츠는 명확하다. 규칙이 엄정하고 결과가 분명하다. 승패가 분명하고 그 이유도 눈에 보인다. 선수의 실수도 보이고 감독의 결정적 오판도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휘슬이 불릴 때까지, 마지막 타자가 아웃될 때까지 선수들을 응시한다. 다시, 우리는 왜 스포츠에 열광하는가. 내게 주어진 모든 조건들의 타이밍은 언제나 너무 늦거나 빠르기 때문이다. 진학, 취업, 승진 등 사회적 절차에서 우리는 번번이 타이밍을 잃거나 빼앗긴다. 세상의 패스는 늘 너무 늦거나 너무 빠르다.

타이밍! 스포츠는, 그 어떤 종목이든지, 1초 이내의 긴박한 순간에 벌어지는 절묘한 타이밍의 세계다. 정확한 패스와 터닝슛, 찰나와 같은 도루와 간발의 세이프, 공의 궤적과 속도를 감각적으로 판단하고는 전속력으로 달려 온몸을 던져 마침내 지면에 닿기 직전의 공을 잡아내는 외야수! 우리는 경탄한다. 아, 저와 같은 타이밍이야말로 내가 이 거친 세상에서 단 한번이라도 겪어보고 싶은 순간이 아니던가. 그래서 경기장에 간다. 선수들 이름을 외쳐 부른다. 지고 있어도 응원한다. 지고 있는 저 선수들의 지친 표정이 꼭 우리네 일상과 닮지 않았는가. 9회말 세 번째의 아웃이 선언되기 전까지, 열렬히 응원한다. 그게 우리의 삶이다. 마지막 남은 한 번의 기회라도 움켜쥐고 싶은 것이다.

‘불문율’이라는 얘기가 있다. 지난 23일, KT 대 한화의 경기가 도화선이 되었다. 6-1로 앞서가던 한화가 9회초에 도루를 하고 9회말에는 투수들을 연이어 교체했다는 것이다. KT 주장 신명철이 분노를 표시했다. 이용철 해설위원은 “상대를 자극하는 행동이다. 사실상 승부가 결정난 경기에서, 9회말에 이런 식으로 투수 교체를 하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글쎄, 우선 불문율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중에 김성근 감독이 밝혔지만, 9회초 진루한 강경학은 사인을 잘못 파악하고 도루했다. 이에 한화는, 발이 느린 포수 허도환으로 교체했다. 이때, KT 벤치는, 적어도 이용철 해설위원은 이 교체의 의미를 파악했어야 한다. 발이 매우 느린 선수를 들여보낸다? 이를 파악했더라면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윤규진의 등판 또한 양팀 모두, 그리고 해설위원 역시 사전에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큰 점수 차로 패하기 전에 악착같이 달라붙어서, 상대 팀이 테스트 삼아 투수를 교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분명 지켜야 할 금도가 있고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법률로 규제할 수 없는 것처럼, 숱한 상황이 발생하는 경기장의 모든 행위를 규정집에 적을 수는 없다. 규정이 많아질수록 인간은 부자유에 구속된다. 그래서 불문율이 존재한다. 그러나 말뜻 그대로 ‘문자로 적시’되지 않은 것이므로 이를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문자 규정보다 훨씬 정교해야 한다. 막연히 ‘스포츠맨십’이나 ‘동업자 정신’을 적용해서는 안된다.

특히 경기 그 자체의 밀도, 그 뜨거운 몰입의 정념을 무시하는 ‘동업자 정신’은 오히려 반스포츠적이다. 이날 경기는 6회 때 이미 5-1이었고 8회에는 한화가 한 점을 더 추가했다. 그러면 경기가 끝난 것인가. 팬들은 아직 아웃카운트가 세 개나 남아 있다고 열렬히 응원하고 있는데, 선수들은 기운이 빠져 있고, 해설위원마저 6점 날 때부터 이 경기는 이미 끝이 난 거라고 해도 되는가. 언제부터 대여섯 점 차이가 나면 그 경기는 끝난 것이라는 ‘불문율’이 생겼단 말인가.

타고투저 현상에 날씨마저 더워지면서 한 경기, 한 회마다 대량 득점이 발생한다. 20일, 삼성은 두산을 25-6으로 꺾었다. 23일, 롯데는 LG를 19-11로 이겼다. 9회나 연장까지 가서 웃는 자와 우는 자가 바뀌는 일도 늘고 있다. 10일, 두산은 한화전에서 9회말에 뒤집었다. 17일, 이번에는 한화가 넥센을 연장까지 물고 늘어져서 이겼다. 아니, 당장 다음날 경기에서 KT가 입증하지 않았던가. 비정해 보이는 한화 야구를 무섭게 몰아쳐 13-4로 이기지 않았던가.

물론 불문율이 있다. 보복 투구는 절대 금지다. 투구 방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릎을 보고 들어가는 슬라이딩은 퇴장이다. 거친 욕설 또한 그렇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불문율은 야구를 존중하는 것이다. 야구는 9회말부터라고, 그것을 귀하게 여기던 ‘스포츠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이 거친 세상에서 연거푸 패퇴한 팬들은 한 베이스라도 더 가려고 치고 달리는 선수들을 보기 위해 경기장에 간다. 마지막 아웃카운트 선언 때까지 함성을 지른다. 그것을 존중하는 것, 가장 중요한 불문율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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