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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 않고 살아가던 것을 묻게 되는 순간이 있다. 책이 종종 계기가 된다. <죽은 자의 집 청소>는 홀로 죽은 이들의 집을 치우는 특수청소부의 이야기다. 죽은 이들의 자리는 보이지 않던 세상을 드러낸다. 집 밖에서부터 알아볼 수 있는 몇 가지 죽음의 단서. 잊을 수 없는 것은 우편함이다. 수북이 쌓인 우편물은 수취인의 변고를 증언한다. 그 속에 전기요금 고지서와 체납독촉장이 있다. 그리고 전기 끊긴 날, 죽는 사람이 있다. 전기가 끊긴 날은 어떤 날이었을까? 어두워졌지만 불을 켤 수 없고, 냉기가 스며들지만 전기장판도 켤 수 없고, TV도 안 나오고, 컴퓨터도 휴대폰도 켤 수 없는 날. 전기가 끊기는 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이다. 단전 예고일은 사형 선고일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전기는 빛이고, 열이며, 동력이다. 연결, 관계, 소통도 전기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전기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세상, 그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전기는 삶을 위한 필수재이고 기본권이다. 전기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 전기가 멈추면 세상이 멈추는 것이다. 전기가 그런 것이라면, 그 전기는 ‘어떻게’ 생산되고 공급되어야 하는가? 남겨진 전기 체납고지서는 전기에 대한 다른 감각을 알려준다. 전기는 돈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기가 닿지 않고 있을까? 자료를 찾아봤다. 지난해 산업통상자원부가 구자근 의원에게 제출한 ‘최근 5년간 전기요금 체납 및 단전현황’에 따르면, 2020년 7월 기준으로 전기요금을 체납한 가구 수는 약 80만가구, 납기일이 지나 단전된 가구 수는 15만가구에 이른다. ‘빛 공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밤이 너무 밝아 별도 안 보인다는 세상에서, 한 해에 소도시 하나만큼 불이 꺼지는 셈이다. 여기에 이르면 전기요금을 올려야 한다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는다. 저렴한 전기는 저렴한 토지와 저렴한 노동에서 나온 것이지만, 제값의 전기가 제값의 노동을 돌려줄지는 보장이 없다. 에너지 전환을 경제적 효율성과 기술적 적합성에 종속시켜서는 안 되며 반드시 정치적 관계와 연결해서 생각해야만 하는 이유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에너지 전환 정책에는 ‘더 민주적으로, 더 공공적으로’라는 정치적 의제는 사라지고, ‘더 빨리, 더 많이’ 재생에너지 비율을 높이라는 양적 목표가 전환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 있다. 정의로운 전환의 원칙은 수립되지 않고 있는데 ‘발전량, 감축량, 전환비율’ 같은 수량화된 목표치가 담론과 정책을 좌우한다. ‘빨리’와 ‘많이’는 결국 대자본 대규모의 국책사업이 중심 정책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건설시장과 금융시장을 동시에 부양하니 정부의 그린뉴딜을 기업들이 가장 환영한다. 기후위기의 가장 큰 피해자일수록 기후위기 대응 정책을 불신하고 비판하는 역설적 현상이 나타난다.
그래도 일단 재생에너지를 양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일까? 그 발전소의 건설 노동자들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위험한 노동을 수행해야 하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여전히 지금처럼 건설현장에서 다치고 목숨을 잃는다면? 재생에너지에서 나온 전기만을 100% 사용하는 기업에서 공장이 24시간 체제로 돌아가고, 그 속에서 노동자들이 과로사로 죽어나간다면? 기업이 발전 단가를 낮추는 방법에는 기술적 방법 외에 노동비용을 줄이는 방법이 들어가 있지는 않는가? 만약 그 기업이 다국적 거대 자본이라면 국내 사업을 철수하게 될 때 입을 사회적 타격은 어느 정도일 것인가? 에너지의 생산 및 관리권이 기업으로 넘어갔을 때, 시민들이 개입하고 규제할 수 있는가?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엄청나게 많다. 태양광 지붕 아래서 심장이 터지도록 일하는 게 우리가 원하는 전환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바꿀 것이냐’에서 ‘어떻게’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의로운 전환’의 방향과 내용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에너지에 대한 전환의 구상이 없는가. 자기 삶터와 일터에서의 해법은 누구보다 잘 안다. 주택 지붕이나 옥상 위에 태양광 발전시설을 설치해서 건물에 필요한 전기를 자체 조달하고, 그러고 남은 전기는 마을과 지역의 공공시설에 사용하며, 지역에서 필요한 전기는 지역에서 생산하고 지역 간 교환하며, 국가적으로 필요한 전기는 공기업에서 발전 생산하자. 에너지 전환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평범한 많은 이들이 생각했던 것은 대부분 이런 자치와 자급의 구상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어떻게’를 이야기하자. 방향과 방법을 함께 이야기하자. 어떻게? 우리는 더 정의롭고, 더 평등하고, 더 민주적인 전기를 원한다.
채효정<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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