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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에 해설을 곁들이는 음악회에서 사회자인 전직 아나운서가 인사말을 한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쁜 것은 맞는데, 와중이라니? 와중(渦中)은 ‘물이 소용돌이치듯 복잡한 일이 벌어진 가운데’라는 뜻이다. 그냥 ‘바쁘신 중에도’라고 했으면 좋았을 게다. 곡 해설이 이어진다. “이제 말러의 교향곡을 들으시겠습니다. 말러는 교향악단을 지휘하면서도 호시탐탐 작곡을 했던 음악가였습니다.” 말러가 호시탐탐(虎視耽耽) 작곡을 하였을 때 그는 정말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고 먹이를 노려보듯 하였을까. 그러다가 사회자는 ‘이율곡씨’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자녀 교육 방법을 찬양한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 몰라도,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런 지칭법은 아무래도 기이하다.
변호사가 법원에 내는 서류에 과거 어떤 문서를 낸 일이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접수’했다고 기재하는 일이 종종 있다. 접수는 법원이 하는 행위라고 이르면서 ‘제출’로 고쳐 놓으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자문해 드립니다’라는 표현도 가끔 본다. 누군가 물어 오는 행위가 자문(諮問)이고 변호사는 자문에 응하거나 답하는 것이라고 가르쳐도, 수긍하지 않을 때가 많다. 한자 교육이 잘 되지 않아서인지, ‘피고도 주지하다시피’라는 말도 소송서류에 심심치 않게 보인다. 주지(周知)는 여러 사람이 두루 안다는 뜻이니, 피고가 주지하는 것도 틀린 건 아니라고 봐야 할까. 언젠가 국회에서 어느 장관이 의원의 질문에 “질의에도 금도가 있다”라고 일갈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 발언의 맥락으로 보면, 질문을 하더라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다는 정도의 뜻 같은데, 실상 금도(襟度)는 ‘다른 사람을 포용할 만한 도량’이라는 뜻이다.
대화 중 누군가 영어로 뭐라고 하자, 고위직 법관의 경력을 가진 이가 나무라듯 한마디 한다. “한글로 합시다.” 우리말로 하자는 뜻 같은데, 말과 글이 다름을 아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일까. ‘난이도가 높은’ 문제, ‘대인배’ 같은 아량, ‘역대급 오랜’ 장마, ‘유명세를 탄’ 연예인…. 이런 말투를 들자면 끝이 없다. 그냥 “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할 상황에서 “~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자주 들을 수 있다. “이 부동산의 시세에 관해서는 이미 전문가의 의견을 받은 부분입니다.” 이것도 “의견을 받았습니다”라고 해야 할 텐데, 요즘엔 걸핏하면 까닭 없이 ‘부분입니다’로 문장 끝을 맺는다.
정치계, 거친 말본새 횡행
언어가 품위를 잃을 때
강자의 언어는 폭력이 돼
하수의 선택 ‘막말’ 제재를
한번은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록’이라는 문구가 담긴 글을 신문사에 보냈더니 그게 ‘1,000년의 세월’로 바뀌어 실린 일이 있었다. 이러니 ‘2중으로’ ‘3분이 왔다’ ‘4가족’ 등은 이제 시빗거리도 못 될 듯하다. 주문한 커피가 곧 ‘나오실’ 것이니 저기 ‘보이시는’ 의자에 앉아 기다리다가 혹시 너무 늦으면 왜 그런지 그쪽 직원에게 ‘여쭈어’ 보라는 커피숍 종업원의 말을 듣다 보면, 이걸 어쩌나 싶다. 어문교육이 부실한 탓일까, 아니면 우리말이 총체적으로 변하는 과정에 놓여 있고 언젠가는 그 이상한 말들이 주된 세력을 얻는 날이 오는 것일까. 그나마 이런 것은 가르치면 될 일로 치자. 하지만 막말은 어쩌나. 대통령을 지칭하면서 성(姓)에 ‘재앙’이나 ‘죄인’이란 말을 붙이는 짓거리는 소셜미디어에서 늘 본다. 하긴 목사란 사람의 입에서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라는 말이 나오는 세상이다. 일전엔 법조인 사이에 ‘대한문국(大韓文國) 법률용어집’이라는 글이 돈다며 소개하는 기사가 군소 인터넷 매체도 아닌 주요 일간 신문에 버젓이 실렸다. 판결을 ‘判缺’, 법관을 ‘法棺’, 법무부를 ‘法無腐’로 표기하고는 대단한 풍자감각이라도 지닌 양 재는 모습이라니, 딱하다.
더 큰 일은 ‘토착왜구’니 ‘병신’이니 하는 거친 말본새가 공론장에서 횡행하는 정치계다. ‘왕조시대 폭군의 논리구조’와 ‘사기 정당’이 맞선다. 선거 때마다 엉덩이 높이 치켜들고 올리는 엉터리 큰절의 과공 따윈 그만두고, “의원은 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여야 한다”라는 국회법 제25조나 새겨 보았으면 좋겠다. 의원이 국회에서 막말을 하면 엄하게 제재하는 법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나는 대로 해 보는 말이 아니다. 영국엔 실제 그런 법이 있다.
언어가 품위를 잃을 때 강자의 언어는 폭력이 되고 약자의 언어는 권력에 대항할 힘을 잃거나 자칫 재갈을 쓸 위험에 놓인다. 막말은 하수의 선택이다.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 따위의 언사를 예사로 내뱉는 북한의 언론매체를 보라. 언어의 품위를 지키는 일은 바른 정치학의 첫걸음이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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