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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저기 난자에서 쉬었다 가요.” 나들이를 갔던 어느 해 가을, 유치원생 첫째가 멀찍이 있는 정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말을 들으며 이 아이도 어떻게 아기가 생기는지 배웠다는 것을 직감했다. “저건 난자가 아니고 정자야, 난자 짝꿍 정자랑 저 정자는 서로 달라.” 설명을 해주면서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멈추기 어려웠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생명이 잉태되는 방법을 유치원생도 다 아는 세상이지만 어떤 생명은 참 어렵게도 세상에 온다. 성폭력 피해로 일상생활 유지가 어렵다는 한 여성을 만난 날, 남산만큼 불러 있는 배에 깜짝 놀랐다. 배안 아기의 아빠는 가해자였고, 몇 달 째 잠적 상태였다. 지적장애와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던 이 여성은 두 달 후면 성별도, 건강 상태도 모르는 아기를 만나게 되는 상황이었다. 임신 기간 내내 하루에 한 갑씩 담배를 피웠고, 몇 년 전부터 정신과 약을 먹어왔다는 그녀의 아기가 많이 걱정되었다. 일단 긴급하게 통합사례지원체계를 연결하고 아기 출생을 기다리기로 했다.
피해자는 아기를 입양 보내길 원했다. 몸을 풀자마자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오면서 나는 바쁘게 전화를 돌렸다. 하지만 100통도 넘는 요청은 모두 거절되었다. 엄마가 결혼한 적이 있다고요? 그럼 우리 미혼모 시설은 입소가 안 되는데요. 엄마가 아기를 낳고 온다고요? 아시다시피 지적장애인 거주 시설은 산후조리까지 해 줄 수는 없어요. 성폭력 피해자 쉼터는 아기 낳은 몸으로 오기 어려워요. 저희 모자시설은 엄마만 입소할 수는 없어요. 피해자가 갈 곳은 없었다.
아기가 갈 곳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역시 아무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엄마가 정신적 장애가 있다는 점, 임신기간 동안 약물과 흡연에 태아가 노출됐다는 점, 친부가 행방불명인 점 등이 주된 이유였다. 아기는 곧 세상에 나올 상황이었고 아기 엄마는 이 사회가 보편적으로 지목하는 사회적 약자였지만 누구도 이 여성의 선택과 아기를 반기지 않았다.
빌다시피 간청했던 한 민간기관에서 기적적으로 연락이 왔다. 아기가 보육원에 입소하기 전까지만 임시로 돌봐주겠다는 것이다. 이제는 엄마에게 법이 정한 절차를 이해시켜야 했다. 아기를 입양 보내려면 출생신고가 불가피하다고 설득했다.
다행히 아기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그 핏덩이가 세상에 온 지 3일이 되던 날, 엄마를 도와 출생신고를 했다. 산부인과를 퇴원해 정신과에 입원하는 피해자는 담담하게 아기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고 나는 아기를 안고 돌봄기관에 데려다주었다. 두 달이 지나 뽀얗게 하얀 살이 오른 아기는 영아 전담 민간보육원에 무사히 입소했다. 그 모든 상황 어디에도 아이의 친부와 공적 체계는 없었다.
얼마 전 우리 사회에 큰 화두를 던진 한 방송인의 비혼 출산을 두고 ‘아빠 없는 아이를 이 세상에 내놓은 것은 아이에 대한 폭력’이라는 말이 들린다. 정작 엄마는 아기 덕분에 꿈같이 행복하다고 하는데도 소위 ‘정상가족’의 허상에서 비롯된 오지랖이 낳은 무례함이다. 그렇다면 친부를 특정할 수 없거나, 친부가 양육책임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아기를 낳겠다고 선택하는 것도 아이에 대한 폭력인가. 내가 만난 피해 여성의 선택도 마찬가지인가. 사실상 임신중단을 선택할 수 없는 나라에서 출산했다는 비난에 직면하는 피해자의 마음은 얼마나 당혹스러운가. 모순적이게도 ‘정상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안전하지 못하다. 우리나라 청소년(9~24세)의 사망 원인 1위는 2011년 이후 8년 연속 자살이다.
누구나 인간이 감히 예상할 수 없는 이유로 세상에 온다. 생모와 3일 만에 헤어졌지만 보육원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을 아이나 비혼 출산으로 태어나 오늘도 엄마와 ‘꽁냥꽁냥’ 시간을 보낼 아이 모두 환영받아 마땅하다. 이제 그 아이들이 정상가족 프레임에 갇혀 맥락 없는 혐오에 상처를 받지 않도록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건 우리 모두의 몫이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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