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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비슷한 발음을 이용한 광고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어서 옥션’ ‘결혼해 듀오’는 귀여운 편에 속하고, ‘이것만 기업해’는 무리한 발상이다. 처음 접하면 ‘아재개그’ 같지만, 어느 순간 뇌에 둥지를 틀고 시시때때로 지저귄다. 멋진 모델 없이도 뇌를 점거하니, 성공적인 광고가 아닐 수 없다. 최근에는 뜻밖의 영역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문구가 등장했다. 요사이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승리, 용준형, 정준영 등의 이름과 함께 소설 제목에 빗댄 ‘위대한 승츠비’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예능프로와 아이돌 그룹에 대해 무지한 나는 ‘용준형’이라는 단어를 뉴스에서 보았을 때, “배용준씨마저 사건에 연루됐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도 ‘빅뱅’을 모를 수는 없지만, 멤버 중 하나가 ‘승리’라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급기야 ‘승츠비’라는 별칭을 접하게 되었다. 누구의 발상인지 모르나 상표출원까지 했다는데, 이게 웬 구시대의 작명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개츠비에 대한 모욕이다.

개츠비는 젊은 부자이고 마침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점 외에는 ‘승리’와 거의 공통점이 없다. 개츠비가 계속 성대한 파티를 연 것은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는 여인의 참석을 고대했기 때문이다. 그는 끝내 개죽음이라는 극적 패배를 겪지만, 그의 흠결 때문이 아니라 속물적 여인에게 과분한 낭만적 사랑을 바쳤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워낙 유명한 소설인 <위대한 개츠비>를 언제 처음 알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소설도 소설이지만 작가 피츠제럴드의 인생도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처음에는 당신이 술을 마시지만,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그다음에는 술이 당신을 마신다”는 말이 그의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와 관련한 내 첫 번째 기억은 20대 중반에 친구가 영문판을 선물한 것이다. 1974년 제작된 영화의 주인공 로버트 레드퍼드와 미아 패로의 스틸사진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나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에 매료되었는데, 소설을 영어로 편히 읽을 실력이 못되어 읽지는 못했다. 다만, 나중에서야 개츠비가 위대한 인물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씁쓸하게 살해당하는 이야기임을 알고 당황했다.

실제로 소설을 읽은 것은 훨씬 뒤였다. 나는 개츠비를 지켜보는 소설 속의 화자인 캐러웨이처럼 개츠비를 좋아하게 되었다. 성공에 대한 그의 간절한 염원은 옛 연인을 다시 만나려는 낭만적 열정과 포개진다. 젊은 그가 어떻게 부를 거머쥐었는지 의심스러우나, 그는 어디까지나 신사였다. 대공황 이전 뉴욕 동쪽의 롱아일랜드에 모여든 숱한 속물들 속에서 드물게 순수했던 개츠비는 결국 파멸할 운명이었을까. 나는 그를 억울한 죽음에 이르게 한 옛 연인 데이지와 그 남편의 부조리함이 미웠다. 그들의 심성은 어떤 의미에서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함 또는 진부함’의 일종이리라. 소설은 ‘젊은 베르테르’와 같은 한 이상적 낭만주의자를 그려냈다. 그러나, 낭만주의를 찬양하고 고무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운 몰락을 지켜보게 함으로써 아이러니한 비애를 자아낸다.

2013년에 제작되고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주연한 영화도 기대를 가지고 보았는데, 매우 화려하기는 했지만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것이 온전히 영화의 한계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디캐프리오는 비슷한 나이의 리버 피닉스가 요절한 뒤 지금까지도 부귀영화를 누리는데, 나는 어쩐지 그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 감정이입하는 데 자주 어려움을 느낀다. 지금의 사태 때문에 개츠비가 입길에 오르내리면서 뒤늦게 1974년도 영화도 찾아서 보았다. 원작에 충실한 작품이었는데, 나로서는 훨씬 받아들일 만했다.

파티광이 아니며 한 여인에게 순정을 바치는 개츠비는 과연 위대한가. 막대한 부의 출처가 범죄와 연루된 의심이 있고, 속물적인 여인에게 사랑을 바친다는 점에서 ‘위대하다’는 수식어는 부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비현실적 낭만성이 매우 희귀하다는 점에서는 ‘위대한’이라는 말이 적절하기도 하다. 우리가 모르는 놀라운 사정이 있지 않는 한, 지금 회자되는 문자메시지만 보더라도 ‘승리’에게는 이 수식어를 붙일 수 없다. 나는 그래서 ‘승츠비’라는 말에 모욕감을 느낀다. 겨우 소설 속 인물 때문에 모욕감을 느끼느냐고? 아니다. 개츠비는 그럴 자격이 있다. 비록 피와 살이 없는 가상의 존재지만, 개츠비는 생기를 잃고 살아가는 우리 중의 어느 누구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훨씬 피가 뜨겁고 존재감이 있다.

사랑이 호르몬 분비의 문제거나, 정신분석의 문제거나, 또는 경제적 교환의 문제임이 점점 뚜렷해지는 세상에서, 개츠비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개츠비는 그래서 위대하다. 믿으면 존재하고 믿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사랑의 아이러니 속에서, 그는 한 여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심지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목숨까지 바친 인물이다. 그는 여성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거나 물건처럼 다루지도 않았다. 다만 그 여인이 나라면 절대로 사랑하지 않을 인물이라는 점이 안타깝다.

유명하다는 이유로 더 유명해지고 그로 인해 부자도 되는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건 대체 뭘까. 애초에는 어떤 재능이 유명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유명한 허깨비일 뿐인데도, 스스로 공인으로 생각하며 인기를 확대재생산하는 데 분주한 사람이 즐비하다. 어떤 재치있는 사람은 ‘유명인이란, 유명하다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펄쩍 뛸 일이 많지만, 스피노자가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는 걸 안 이후로는 가능하면 참으려 한다. “비웃지도 말고, 개탄하지도 말고, 분노하지도 말라. 오로지 이해하라.” 그런데, ‘위대한 승츠비’라는 난감한 조어와 그들이 주고받았다는 메시지는 스피노자를 무색하게 한다.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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