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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웹소설협회가 15일 ‘문체부는 도서정가제 개악 즉각 중단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지난주에는 한국출판인회의가 같은 취지의 입장문을 냈고, 31개 출판·문화계 단체로 구성된 공동대책위원회도 성명을 통해 정부를 규탄했다. 독서 진흥·출판 지원 사업을 하는 문화체육관광부가 관련 단체로부터 이토록 맹렬히 공격받은 전례가 없다.

도서정가제(도정제)는 서적 등 간행물에 표시한 가격대로 유통되도록 법으로 강제하는 제도다. 다른 공산품에는 없는 정가제를 법률로 만든 것은 ‘사회적 공공재’인 책의 유통 혼란을 막아 저자·출판사·서점을 보호·육성하겠다는 취지다. 앞서 독일, 프랑스, 일본 등 많은 나라들이 도정제를 채택했다. 한국은 2003년 처음 도입했으며 2014년 법 개정을 통해 현재는 신·구간 구분 없이 모든 도서를 최대 15% 내에서만 할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현행 도정제는 완전한 정가제라기보다는 ‘도서가격 할인제한제’에 가깝다.

도정제는 시행 6년차를 맞은 지금 안착 단계에 접어들었다. 서점 등 유통시장은 발행 18개월 이내의 신간 중심으로 재편됐다. 발행 종 수가 늘면서 신간이 베스트셀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함께 높아졌다. 폐업하는 지역서점은 줄어든 반면 취향과 개성, 지역성을 강조하는 동네책방, 독립서점, 소형 출판사는 눈에 띄게 증가했다. 도정제가 새로운 출판 생태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현행 도정제는 3년마다 타당성을 검토해 폐지, 완화, 유지 등 조치를 취하도록 법에 규정돼 있다. 오는 11월20일 재검토 시한을 앞두고 출판계는 당연히 ‘유지’를 전망했다. 3년 전에도 ‘유지’된 데다 여론도 우호적이기 때문이다. 도정제 타당성 검토를 위해 지난해 7월 출범한 민관협의체는 1년간 16차례 회의를 통해 현행 틀을 유지하는 것으로 합의안을 도출했다. 그런데 최근 문체부가 민관 합의안을 뒤엎고 장기 재고도서와 웹소설의 도서정가제 제외, 전자책 20~30% 할인 등의 방안을 제시하면서 상황이 급반전했다.

문체부의 안대로 도정제가 개정된다면 모처럼 자리를 잡아가던 출판 생태계가 크게 흔들릴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장기 재고도서의 도정제 제외는 구간 할인으로 이어져 중소서점을 타격할 가능성이 높다. 전자책 할인폭 확대는 도정제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다. ‘유지’를 넘어 프랑스와 같은 ‘완전 도서정가제’까지 기대했던 출판계는 뒤통수를 맞은 듯 당혹해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문체부의 태도다. 문체부는 개정 방안을 일방적으로 제시하면서 ‘민관협의체 합의 파기가 아니며 전 국민 의견 수렴을 통해 개선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왜 합의안을 수용하지 않았는지, 민관협의체 이외 어떤 의견 수렴 방법을 도입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출판계는 문체부가 현행 도정제를 ‘개악’한 배후에 윗선이 작용했다고 주장한다. ‘청와대 개입설’이 제기되고 청와대 고위 인사의 실명이 거론될 정도다. 정부의 입장 선회에 지난해 20만명이 동의한 ‘청와대 도정제 폐지 국민청원’이 작용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청원의 내용이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쓰인 데다 민관 합의 이전의 일이어서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정부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온 국민청원 게시글들은 한결같이 ‘민의’나 ‘소비자 후생’을 내세우며 도정제의 폐지·개정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는 양서 발간, 지역서점 보호와 같은 출판의 공공성은 보이지 않는다. 상품처럼 쉽게 구매해 소비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시장주의만 넘쳐난다. 디지털시장의 강자로 부상한 네이버·카카오 등의 대형 콘텐츠업체나 도서유통 진입을 노리는 IT업체들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현행 도정제가 급부상하고 있는 웹소설·웹툰과 같은 전자출판물 시장에 대한 고려가 미흡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당장 웹 콘텐츠를 도정제에서 제외시킨다든지, 전자출판물의 할인율을 크게 높일 일은 아니다. 웹 콘텐츠가 도서인지 아닌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부터 내린 뒤 일반 서적과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 역시 충분한 토론과 협의 절차를 거쳐야 함은 물론이다. 문체부는 도정제 개정과 논의 과정을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출판·유통시장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밀실’에서 결정되고 ‘보이지 않는 손’에 좌우돼서는 안 된다. 도정제는 시장과 문화의 갈림길에 있다. 문체부는 확고한 철학을 갖고 이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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