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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중립에 속도가 붙었다. 지난해 10월 문재인 대통령의 ‘2050 탄소중립’ 선언 이후 정부 부처별 추진 전략이 나오고, 기업의 탄소중립 선언도 늘고 있다. 지난 4월 지구의날, 40개국 정상이 참여한 ‘기후정상회의’가 열렸다. 이틀 전 ‘2050 탄소중립위원회’가 출범했고, 어제와 오늘 ‘P4G 서울 녹색미래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다.
탄소중립에 추진 속도가 중요하다면, 추진 방향은 더욱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방향은 기술과 경제 일변도였다. 기술 혁신으로 탄소를 감축하겠다는 발상에는 현재의 생활양식은 변함없이 유지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생활양식의 전면적 전환 없이 제한된 시간 내에 기술만으로 탄소중립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탄소중립은 감축 못지않게 시간과의 싸움이다. 며칠 전 기상청은 1.5도 상승까지 7~13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탄소중립을 코로나19로 위축된 경제의 반전 계기로 삼겠다는 발상에는 어쨌든 경제 성장은 포기할 수 없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 그러나 성장을 추구하면서 탄소중립에 필요한 과감한 감축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석탄발전은 온실가스 최대 배출원이지만 국내에서는 7기의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이 계속되고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석탄발전사업 투자도 결정됐다. 가덕도신공항과 제주 제2공항같이 탄소를 다량 배출하는 토건사업도 여전하다. 모두 ‘성장’을 위한 것이다. 요컨대 생산과 소비의 지속적 확대를 뜻하는 성장을 추구하면서 기술만으로 탄소중립이 가능한가? 녹색미래와 그린뉴딜도 좋지만, 생태적 파괴를 막는 경계와 견제의 원리여야 할 ‘녹색’이 언제나 ‘성장’에 유린당해 온 현실을 직시하자.
기술·경제 중심의 탄소중립 발상
소비 확대 유지한 채로 가능할까
기후위기는 철학과 윤리의 문제
삶의 근본적 전환 있어야 극복
‘과잉의 삶’ 감축하겠다는 결단을
기후위기와 탄소중립은 근본적으로 기술과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과 윤리의 문제다. 기후위기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묻고, 탄소중립은 삶이 어때야 하는지 묻는다. 경기 양주의 한 수녀원, 밭으로 가는 수녀님에게 물었다. “수녀님, 뭘 들고 가세요?” “똥이오. 거름 하려고요.” 아직은 서툴고 벌레를 만나면 “으악!” 소리를 지르지만, 밭에서 흙을 만지며 자연의 질서인 순환을 배운다. 땅과 교감하며 ‘아담’(사람)이 ‘아다마’(흙)에서 나왔고 다른 생명체도 흙을 매개로 사람과 연결되어 있음을 실감한다. 모든 생명체가 흙과 공기와 물과 햇볕으로 생장함을 체험한다. 모든 것의 근원적 유대를 느끼며 생태적 감수성을 익힌다. 내 ‘숨’은 지구의 ‘숨’에 달려 있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장일순)
경기 화성의 한 수녀원, 산림청이 온실가스 흡수를 늘리려고 추진하는 ‘30억그루 나무 심기’에 관해 말하다 ‘모두 베기’로 민둥산이 된 벌채 현장이 화제가 되었다. “거기 살던 동물들은 다 어디로 갔을꼬?” 한 수녀님은 이야기를 듣고 안타까운 듯 탄식했다. 산림청장은 그런 현장은 “통상적이고 합법적인 목재 수확 임지”라고 태연하게 설명했다. 누구에겐 숲이 돈이나 탄소흡수 기계지만, 숲의 노래를 귀여겨들어본 사람은 숲이 생명이고 뭇 생명의 보금자리임을 안다. 통상적이고 합법적일지 몰라도 이런 방식의 벌채는 폭력이다. 숲에 가하는 폭력은 자연을 넘어 사회에서도 통상적이고 합법적으로 일어난다, 비정규직과 하청이란 이름으로. 근원적 유대의 관계에서 하찮은 존재란 없다. 모두 자기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 생태적 감수성은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한 ‘공경’과 ‘겸손’을 낳는다.
기후위기가 현실이 되면 인류는 파국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기후위기를 극복한 세상이 지금의 세상과 비슷할 수는 없다. 탄소중립은 우리 사회가 환골탈태하는 분수령이어야 한다. 대량 생산과 소비에 기초한 삶의 근본적 전환 없이 기후위기는 극복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탄소를 기적처럼 감축해줄 기술이 아니라 과잉의 삶을 적정 수준으로 감축하겠다는 결단이다. 그러려면 내면의 변화, 질적 고양이 필요하다. 근원적 유대로 연결된 ‘집’에서 함께 살고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과 세상의 뭇 존재에 대한 공경이 요청된다. 타자의 일방적 희생을 담보로 모든 결핍에서의 해방과 무한한 풍요를 좇는 욕망의 구조를 고집하는 삶은 결국 모두를 파괴한다. 공경과 겸손 없이 인간이 하는(人爲) 것은 거짓(僞)으로 전락한다. 탄소중립은 이룰 수 없고, 기후위기는 막을 수 없다.
정부는 기술과 성장의 길을 고집할 것이다. 오랜 관성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정부에는 새로운 길을 그릴 수 있는 상상력과 자유가 없다. 땅의 신음을 듣는 풀뿌리 시민들이 연대하여 변화의 길을 열 수밖에 없다. 탄소중립 ‘선언’도 시민들이 그렇게 끌어낸 것이다.
우리부터 공경과 겸손의 마음으로 자율적인 공생과 협동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럴 때 탄소중립 ‘실현’의 희망을 말할 수 있다.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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