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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농단 사태는 박근혜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박근혜 체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통령을 꼭짓점에 두고 수백만 공직자가 연계된 위계적 피라미드 형태의 이 체제는 놀랍게도 아직 가동 중이다. 청와대가 법원의 영장을 받은 특검의 압수수색을 거부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특검을 거부한 청와대가 택배차량 출입을 버젓이 허용하고, 수석 및 장관들과 독대하지 않는 대통령이 말 중개상을 단독 접견한 것은 이 체제가 연출한 부조리극의 실체다. 이들이 시민들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청와대를 낙동강 전선 삼아 농성하고 있는 것도 이 체제를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서 미국의 고위공직자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야만적인 반이민 행정명령을 막은 것은 신선해 보인다. 샐리 예이츠 법무장관 대행은 행정명령 변호 거부로, 시애틀 연방법원 제임스 로바트 판사는 행정명령 효력 중단 선고로 미국 공직사회의 건강성을 입증했다. 예이츠 장관 대행은 “대통령이 위법적인 일을 지시하면 ‘노’(NO)라고 말하겠다”던 청문회 때 약속을 지켰다.

임기 초반 대통령의 서슬 퍼런 권력에 맞서 단호하게 노라고 외치는 미국의 공직자들은 한국에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정권에 충성하지 않고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 공직자들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최순실 사태는 한국의 공직자들이 노라고 외치지 못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9차 변론에 증인으로 참석하기에 앞서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예외도 있었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박 대통령의 낙하산 인사 지시를 거부했다가 퇴출됐고, 노태강·진재수 전 문체부 국·과장은 최씨 딸에게 불리한 감사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이유로 좌천당했다. 최씨가 150억원의 예산을 전횡하려던 사업 추진을 몸을 던져 막은 정준희 문체부 서기관도 희망의 빛을 던진다. 문체부 공무원들은 블랙리스트 증거자료를 없애라는 장관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고 특검에 제출했다. 한국 공무원들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이들은 직을 걸고 증명했다. 하지만 이들의 용기에도 불구하고 블랙리스트는 도중에 무산되지 않고 실행됐다. 공직자 개인 차원의 문제 제기는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제도화되지 않은 저항이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에서 효율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국정 전반에 걸친 농단이 가능했던 이유다.

어느 조직에서건 노라고 말하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데 따른 당사자의 불안감을 떨쳐낸다 해도 안정을 추구하는 다른 구성원들과의 다툼을 피할 수 없다. 애초 누군가가 자신의 질서를 상대방에 관철시키려고 하는 일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 관가에는 권력에 줄을 대 출세를 꾀하는 영혼없는 공무원들로 넘쳐난다. 권력자 주변을 맴돌며 권력 남용 도구 역할에만 골몰하는 그들로 인해 양심과 사명감으로 일하는 공무원들은 우대받지 못하고 조직에서 밀려나고 있다. “시키는 대로 하라. 아니면 문체부를 떠나라”고 윽박지른 김종 전 문체부 차관이 대표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무원들이 논리나 이성을 관장하는 ‘인간의 뇌’ 대신 생존 및 본능과 관련된 ‘파충류의 뇌’를 활용한다고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다. 공무원들에게 소신과 정의를 지키라고 요구하려면 먼저 할 일이 있다. 헌법 제7조는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이 정도로는 안된다.

‘이유 있는 항명’의 조직 문화는 제도에서 나온다. 미국 공직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인사권 남용이나 부당한 행사로부터 공무원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연방인사처 산하 ‘실적제도보호위원회’나 ‘특별검찰관’이 그것이다. 한국에도 법적으로는 부당하거나 위법한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징계하거나 해임할 경우 공직자가 소청심사위원회 등을 통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다. 하지만 대부분 심증만 있지 직접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구제받는 경우가 드물다. 상급자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문화기본법’ 제정 움직임이 있지만 이는 문체부 공무원만 대상으로 한다. 전체 공무원으로 대상을 확대하고 행정부 및 정치권이 실효적 운영을 담보해야 기대와 현실의 조화가 가능해진다.

공직사회에 대한 사회적 감시와 견제도 필요하다. 무관심이야말로 국정농단을 용인하고 재생산한다는 것을 이번 사태가 똑똑히 보여줬다. 문제 제기를 격려하고 보호하는 문화 정착을 위한 노력도 빠져서는 안된다. 사회 스스로 정의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공무원들의 맹성만 촉구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민의) 책임”이라는 조지 오웰의 경구가 더욱 와닿는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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