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고래가 그랬어’는 지난해 5월부터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이라는 이름의 서명운동을 진행해 왔다. 내용은 이렇다. 


 1. 지금 행복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행복합니다. 

2.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공부는 ‘마음껏 놀기’입니다. 

3.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성공입니다. 

4. 아이와 노동자가 행복해야 좋은 세상입니다. 

5. 교육은 상품성이 아니라 인간성을 키우는 일입니다. 

6. 대학은 선택이어야 합니다. 

7. 아이 인생의 주인은 아이입니다. 


내용 자체로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상식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는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심지어 두렵기까지 한 이야기들이다. 상식이 두려움이 되는 기막힌 상황이야말로 우리의 교육현실이다. 7약속운동은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짓눌리는 부모들에게 반성을 강요하려는 게 아니다. 알다시피 오늘 이 시장주의 교육의 처참한 현실은 구제금융 사태 이후 세 정권에 걸쳐 15년 넘게 진행되어 온 신자유주의 공세에 의한 것이다. 


내 아이를 근심하는 부모들이란 그 거대한 상황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그러나 부모들은 사회 현실에 의해 일방적으로 조종되는 꼭두각시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가진 주체적인 시민이다. 우리는 사회 현실과 사회성원은 유기적 관계라는 걸 되새길 수 있다. 나쁜 사회 현실은 사회성원들을 나쁘게 만들고(좋은 행동은 불리하거나 불안하므로) 나빠진 사회성원들은 다시 더 나쁜 사회 현실을 만들어 낸다. 오늘 한국 교육처럼 말이다. 7약속운동은 그 지긋지긋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작은 노력이다.


7약속운동이 내용 자체로는 대체로 특별할 게 없는 상식적인 이야기들이라 했지만 그중 하나는 좀 다르다. 4번 항목,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노동자’라는 말이다. 그 말이 마음에 툭 걸려 참여가 꺼려진다는 분들이 꽤 있다. 7약속운동 강연을 해보면 질문 시간엔 꼭 그 이야기가 나온다. 두 달에 걸쳐 7약속운동 특집 기사를 진행한 경향신문 역시 협의를 해왔었다. 대중적인 운동이니 대중의 정서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협의에 응했지만 씁쓸함은 남았다. 조·중·동도 아니고 한국 제도언론 중에선 가장 진보적이라는 신문에서의 상황은 오늘 우리 사회의 속사정을 드러낸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노동자 삶이 갈수록 더 나빠지고 있다면

아이들의 미래는 캄캄할 수밖에 없다

덕수궁 천막농성 노동자를 외면한다면 그건

내 아이의 미래를 외면하는 일이다”


사실 노동자라는 말은 아무런 특별한 말이 아니지 않은가. 좌파의 말도, 우파의 말도 물론 아니다. 노동자의 편인가 아닌가로 좌파와 우파를 가를 순 있겠지만 노동자라는 말을 사용하는가 여부와 이념은 무관하다. 성숙한 사회에선 좌우 막론하고 사용하는 중립적인 말이다. 우리가 노동자라는 말을 불편해하게 된 건 반세기 동안의 극우독재 덕이다. 극우독재는 ‘노동자’를 빨갱이의 말로 금지하고 ‘근로자’로 대체했다. 그러나 이제 극우독재가 물러가고 절차적 민주화를 시작한 지 30여년이 되었다. 40대 이하의 시민들은 극우독재의 잔재인 보수세력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전히 노동자라는 말을 꺼릴까. 단지 공포의 기억 때문일까.


열쇠는 말의 문제가 단지 말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공자가 ‘정명(正名)’을 설파했듯 세상이 흐트러질 때는 말부터 흐트러지며 흐트러진 말은 흐트러진 세상을 드러낸다. 극우독재는 ‘노동자’를 ‘근로자’로 대체함으로써 보편적 권리의식을 가진 시민으로서 노동자를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는 노예로서 노동자로 대체했다. 우리는 당연히 노동자라는 말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가 노동자라는 말을 꺼린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의 삶이 여전히 정당하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아이들의 삶이 정당한 상태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노동자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의 행복과 노동자의 행복은 엇나가는 법이 없다. 노동자가 살 만하다는 사회 중에서 한국처럼 아이들이 놀지도 못하고 밤늦도록 학원으로 내몰리는 사회가 있는가. 아이들이 정상범주의 교육환경에서 자라나는 사회 중에 노동자들이 한국처럼 단지 최소한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몇 년 동안 길바닥에서 지내고 고압송전탑을 오르고 제 몸을 불사르는 사회가 있는가. 그리고 대부분의 노동자가 고되게 일하는 생산직만 노동자라거나 나는 시민이지 노동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회가 있는가.


노동자의 삶이 갈수록 더 나빠지고 있다면 아이들의 미래는 캄캄할 수밖에 없다. 대개의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은 세상에서 내 아이만 행복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건 무엇보다 지금 노동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건 무엇보다 현재 노동자의 현실을 바꾸어가는 것이다. 그런 노력에 연대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서울시청 앞을 지나다 새삼 흐뭇한 얼굴로 ‘시장 하나 제대로 뽑았더니 참 좋구나’ 하는 우리가 그 시장이 일하는 건너편에서 단지 노동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6년째 천막농성을 한 노동자들은 외면한다면 그건 어느새 내 아이의 미래를 외면하는 일인 것이다. 좋은 세상이란, 아이와 노동자가 행복한 세상이다.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