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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권은 집권 초기를 빼고는 줄곧 지지율이 낮은 편이었다. 서민대중의 편에 서는 정치를 할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강력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물론 대중은 신자유주의니 따위 개념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갈수록 고단하고 불안해져만 가는 삶을 통해 기대는 환멸로 바뀌어갔다. 신자유주의라 불렀건 안 불렀건 그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환멸이었다. 17대 대선에서 이명박의 500만 표차 압승은 그 환멸의 폭발이었던 셈이다.


집권 후반기에 이르자 지지율은 더욱 가파르게 낮아졌다. 그리고 퇴임 후 노 전 대통령이 형과 부인이 한 일을 시인하면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노 전 대통령이 눈엣가시였던 보수 언론은 얼싸 좋아라였지만 진보 언론도 다르진 않았다. 이를테면 다음날 한겨레는 “국민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한겨레와 경향은 입을 모아 ‘친노세력이 재기불능 상태에 빠졌음’을 선언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열흘 후 노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그 모든 상황은 급반전된다.


‘이명박이 얼마나 괴롭혔으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가’의 측은지심으로 출발한 여론은 ‘얼마나 좋은 대통령이었는가’로, 그리고 이내 ‘민주주의와 진보의 순교자’로 변화했다. ‘친노세력의 재기불능’을 선언했던 진보 언론은 친노세력이 “폐족되는 멸문지화를 당했고” “덩달아 정을 맞았다”며 제 선언을 번복했다. ‘민주주의의 기수’로 부활한 친노세력은 빠른 속도로 ‘진보정권 교체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노 전 대통령과 친노세력에 대한 평가의 급반전에 사실적 인과관계는 없었다. 상반된 평가 사이에 있었던 일은 오직 하나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뿐이었다. 매우 특별하게 여겨질 만한 이 현상은 오늘 한국의 대중이 대통령이나 정권에 대한 평가에서 매우 감상적이고 인간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런 감상적이고 인간적인 태도가 적절한 현실적 분별력을 만나지 못할 때 심각한 사회적 왜곡과 해악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사회는 위험 속으로 치달리거나 정직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은 쳇바퀴 속에 갇히게 된다.


현실적 분별력을 제공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지식인과 언론이다. 주권을 가진 시민으로서 대중이 사회문제에 대해 감상적인 태도에 머물러도 상관없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대중이 사회문제에 대해 지식인이나 언론과 같은 수준의 현실적 분별력을 유지해야 하는 건 아니다. 간혹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과 같은 충격적인 상황에서 대중은 감상적이고 집단적인 흐름을 보이기도 한다. 그걸 견제하는 게 지식인과 언론, 특히 진보 지식인과 언론의 역할이다. 설사 욕을 들어먹고 오해를 사더라도 그 흐름이 사회적 해악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견제할 책임 말이다. 우리가 지식인이라는 말 앞에 ‘비판적’이라는 말을 붙이고, 언론이라는 말 앞에 ‘냉철한’이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 “지식인과 언론이 대중의 집단적 흐름만 뒤쫓는다면

왜 굳이 그들이 존재해야 하는가”


우리는 참으로 간단치 않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2008년 미국발 공황으로 30여년 동안 인류를 야만으로 몰아가던 신자유주의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러나 자본은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손실은 사회화, 이윤은 사유화’하는 방식으로 더 심각한 파국을 만들어가고 있다. 막나가는 자본과 현실적 불안감에 내몰리는 대중 사이에서 좌파는 아직 또렷한 대안을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는 언제나 자본이나 노동 어느 한편이 우세하거나 불안하게 타협하는 것이었지만 자본과 노동이 공멸하는 묵시록적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말마따나 “산사태”가 말이다.


그러나 그 몇 해 동안 한국의 지식인과 언론은 마치 한국은 그런 전 지구적 상황과는 무관하기라도 한 듯 ‘이명박 악마화’와 ‘노무현 미화’라는 공간 안에서만 부유해왔다. 노무현에 열광하다 비난하고 다시 이명박을 비난하며 노무현을 찬미하는 시계추 같은 진동 속에 비판적 지성이나 냉철한 현실인식의 자리는 없었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환멸이 반드시 노무현 정권의 찬미여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명박 정권이 나쁘지만 노무현 정권도 서민대중의 편에 서는 좋은 정권은 아니었다’는 진실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비판적이어야 할 지식인이 대중보다 더 감상적인 행태를 보이고, 냉철해야 할 언론이 대중의 집단적 흐름만 뒤쫓아 다닌다면 왜 굳이 지식인과 언론이 존재해야 하는가. ‘지식인의 죽음’ ‘흉기로서 언론’이라는 말이 오히려 마땅하지 않은가. 대중의 감상적 태도와 집단적 흐름을 견제하긴커녕 지식인과 언론이라는 서푼짜리 권위로 공인하는 형국이니 말이다. 고답적이고 지사적인 지식인상이나 언론의 사명을 되새길 건 없겠지만 지식인과 언론이 존재하는 한 최소한의 역할은 있는 법이다. ‘대중’이라 불리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묵묵히 제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가 작동되고 있듯 말이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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