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지금, 홍대에서 바라본 풍경
경향신문 DB
10년 만의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홍익대학교는 일상이라는 장막아래 가려 볼 수 없었던 대한민국,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관찰하기에 적합한 공간이라는 지금까지 내가 알 던 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 다가왔다. 지금부터 써내려가는 글은 비록 휴학생이긴 하지만 홍대생 중 한 명으로서 홍대 내부에서 바라본 홍대, 그리고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1.하나의 진실?
2011년 1월 2일 홍익대학교에서 근무하던 시설, 경비, 환경 분야 계약직 노동자 노조 170여명이 집단 해고 또는 계약해지 또는 계약파행으로 인한 해고를 당했다. 분명 2011년 1월 2일에 일어난 사건은 하나인데 사건 발생이후 묘사되는 사건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그전에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시간을 보름정도 거슬러 올라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노조를 만든 노동자들은 최저 임금도 보장 받지 못하다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러나 학교 측의 설명을 들은 총학생회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들 중 한 쪽의 말은 거짓이여야 하지 않을까.
경향신문 db
한 가지 사건에 대한 여러 주장은 <라쇼몽>이나 <영웅>같은 영화에서도 나타난다. 여러 이야기 중 끝내 ‘하나의 진실’을 제외한 나머지 거짓들을 밝혀내는 이들 영화는 진실이 아니면 거짓이라는 변현된 흑백논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와 달리 단순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상충하는 듯이 보였던 주장들은 사실 하나의 큰 사건을 각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파편’들에 지니지 않으며 이들의 주장을 종합할 때만이 사건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을 때도 있다. 이럴 경우 하나의 진실과 나머지 거짓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진실들이 존재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전체를 보는 능력이다.
‘최저 임금 문제의 경우를 보면 노동자들이 한 달 임금은 75만2000원을 받아왔으므로 명목상 최저임금 이상을 받은 것은 사실이므로 노동자들의 문구는 수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1달 임금이 적정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휴게 공간 미비와 잡무로 인해 휴게시간 명분으로 시급에서 제외된 3시간 동안 제대로 쉴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하루 10시간을 캠퍼스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된 상황에서 식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점을 볼 때 법이라는 최소한의 기준만 충족 시켰을 뿐 실질적으로는 최저임금을 받지 못한다고 볼 수 있으며 노동환경 등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 ‘최저임금을 보장 받지 못한다.’나 ‘최저 임금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보다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해고 문제의 경우에도 단순한 ‘계약해지’ 혹은 ‘부당해고’라고 말하는 것보다 홍익대학교와 용역업체의 계약이 만료됨에 따라 용역업체에서 노동자들을 해고한 것이며 선례 없는 전원해고가 일어난 점과 그로인해 시설, 경비, 환경 노동자 업무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볼 때 계약해지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노동자들의 계약조건 상향요구가 재계약이 되지 않은 것과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1차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이다.
또한, 2차적으로 협상 결렬과정에서 학생회가 학교 측으로부터 70%임금 인상이 협상 결렬의 이유였으며 민주노총이 노동자들이 요구한 10만원보다 많은 50만원을 상여금으로 신청하는 등 노조 측의 무리한 요구로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설명들은 반면, 노조 측은 협상 중 학교 측의 일방적 협상 결렬 통보를 받았다 설명했다. 이 역시 70% 인상률은 최저임금 인상분, 성과금이 포함된 상승률이고 실질 월금 인상 요구는 75만원에서 108만원으로 인상이었다는 것을 밝혀야 하며, 민주노총이 개입하여 성과급 요구가 10만원에서 50만원으로 증가함에 따라 협상 결렬 요소가 되었다 하더라도, 학교 측의 재계약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면 협상간 조절할 수 있는 문제였다는 사실과 협상과정에서 아쉬운 측은 돈을 받아야 하는 용역업체 측이었을 것이란 것까지 추측 가능하다. 이것은 단순이 해고 혹은 계약해지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것보다 사건의 본질에 다가간 것일 것이다.
홍대 노동자 문제의 핵심요소이자 사건의 출발점인 ‘최저임금’과 ‘집단해고’ 문제는 ‘진실’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관점이 아닌 모든 관점을 꿰뚫는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다양한 입장이 복잡하게 얽혀 있을수록 한 쪽의 주장만이 진실이고 나머지는 것이라는 태도로는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기 힘들어지며 수많은 주장 속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기도 힘들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대논란에서 최저임금과 해고문제는 전체를 바라볼 능력이 없거나 혹은 일부러 보지 않는 학교 측과 노조 측이 서로 자신의 주장을 반복할 뿐, 1월 2일에서 한 치도 진전된 것이 없이 홍대를 부유하고 있다.
2.정치혐오라는 정치적 입장
계약 관계를 보았을 때 홍익대학교 노동자 문제의 주체는 학교-용역업체-노동자로 구성된다. 그러나 여론의 뭇매를 맞은 대상은 홍익대학교 당국이 아닌 총학생회였다. 민주노총 등 외부세력에 대한 배타적 입장과 문제에 대한 소극적 대처방식은 사람들이 기대하던 대학생의 모습과 달랐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학교를 대신하여 도덕적 타락의 상징이 되어 홍익대학교 노동자 문제 관련 기사의 머리말을 장식하게 되었다. 어떤 이유로 신생 총학생회는 여론의 뭇매를 맞아 가면서까지 소극적인 행보를 보인 것일까.
홍익대학교 노동자 문제는 12월 중순 학교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홍보가 시작되고 노조가 결성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월 2일 노동자들이 계약해지 됨에 따라 1월 3일부터 노동자들은 농성 시위를 시작하였다. 총학생회의 농성 시작 전 움직임은 최저임금 문제에 대한 사실여부 확인에 그쳤다.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의 도움을 받아 홍익대학교 학생처 점거 농성을 시작한 후에는 학습권이 침해되지 않게 조용히 해달라는 발언과 외부세력은 허용하지 않는 다는 2차 성명서 발표, 1월 10일 홍대생을 대상으로 한 총학생회 간담회와 이후 진행된 비상대책위원회 설치 과정 까지 시위참가나 홍익대학교 규탄 성명 발표 등보다는 학교 측과의 협상 등 온건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농성시작 3주가 지난 뒤 학교 측에 대한 규탄이 들어간 3차 성명서를 발표한 지금도 민주노총과의 연대 등의 문제에서 소극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활동에 대한 총학생회 측의 입장은 학생의 여론을 따른다는 것이다. 2011년도 홍익대 총학생회는 정치적 활동보다는 도서관 시설 개선 등 학습 환경 개선을 공약으로 내걸고 ‘비운동권’으로서 선거 운동을 하였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힘차게 발을 내디딘 학생회는 새 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정치적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회는 학생 전체 여론이 합의되지 않는 이상 외부세력과 연대하는 것을 거부하는 등 정치적 입장을 띄지 않는 방향을 잡아 자신들이 선거 공약으로 내건 학습권에 대한 발언을 먼저 하였고, 그로인해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비운동권인 자신들을 뽑아준 학생들은 암묵적으로 학생회가 정치성향을 띄는 것을 싫어할 것이라 판단하여 온건하게 움직인 학생회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큼 많은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더구나 1월 10일 학생간담회를 통해 현재 총학생회의 미온적 태도에 비판적 입장을 지닌 학생들이 많음을 확인한 동시에 ‘민주노총’ 등 정치 조직의 개입에 대해 거부감을 지닌 학생들 역시 적지 않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학생회는 외부세력과 함께하는 등의 정치색 강한 입장을 지지하여 민주노총에 배타적 시선을 가진 학생들의 지지를 잃는 것보다는 노동자 들을 순수하게 지지 한다는 ‘무색’에 가까운 입장을 띔으로서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학생들을 하나로 묶는 방향을 선택했다. 그러나 총학생회의 서명운동에 전체 학생의 1/10도 미치지 못하는 학생들이(2월 17일 현재 801명 참여) 참여하면서 총학생회의 이러한 접근 방법은 효과적이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실패의 원인은 여론 합의에 대한 학생회의 전후관계 파악 오류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구성원들 사이에서 어떠한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의견 조율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여론을 수렴하는 ‘장’이 필요할 것이고 수렴된 여론을 바탕으로 행동을 시작하고 그에 대해 피드백을 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적어도 누군가 나서서 토론자리는 열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총학생회는 1월 10일 간담회를 제외하면 이러한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여론이 하나로 수렴되면 학생의 대표로서 그것을 따르겠다는 학생회의 입장은 너무나 쉽게 본 것이다.
이러한 모든 현상의 바탕에는 ‘정치 혐오’라는 현재 20대를 대표하는 정치적 입장이 있다. 이러한 입장은 정치적 색을 띄지 않겠다고 공약한 학생회의 당선을 이끌었고, 다시 한 번 학생회의 움직임을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이번 노동자 문제와 관련하여 학생이 왜 이 문제에 관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의견도 있을 정도로 정치적 무관심은 일반적인 것을 넘어서 ‘쿨 함’의 상징이 되고 있다.
어떤 정치적 현안이 나타났을 때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나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혹은 “저는 중립적입니다.”라는 발언은 비록 특별한 의도가 담겨있지 않을지라도 이미 일어난 일을 암묵적으로 지지해주는 정치적 발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정치적 현안에 대한 모든 의견은 정치적 견해라는 것, 특히 강자와 약자의 싸움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은 강자의 승리로 귀결되는 것임을 배울 기회가 우리에겐 너무나 적으며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이기에는 해야만 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점거농성이 1달 동안 지속되는 동안 한파 속에도 많은 학생들이 농성장을 찾았고 그 이상의 학생들이 관심을 보냈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학생들은 학교 도서관과 학원에서 자기계발을 하는데 매진하고 있다. 사회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부하는 이들은 실제로 바쁘기에 자신들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일에 신경 쓸 틈이 없다는 것은 단순한 핑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의 현실’ 그 자체에 대한 무관심에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면 나 역시도 당당할 수 없다. 문제는 자신들이 직접 피해를 입는 순간에도 그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며 어떤 일인지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현실이다.
어떤 학생은 노동자 분들은 불쌍하다. 하지만 위협적인 시위 모습과 지저분한 플랜카드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며, 많은 학교 중 하필 홍익대학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 언론에 노출된 것이 기분 나쁘다고 한다. 불쾌감만 드러낼 뿐 그 이상 관여하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동정심을 느끼지만 시위, 플랜카드, 기자가 있는 정치는 싫다는 것, 이것이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적지 않은 젊은이들의 정치 입장이다. 짜증을 내지만 분노할 여유는 없는 이들은 사회 속에서 너무 바쁘고, 그 바쁜 사회 속에서 홍익대 노동자 들은 조금씩 잊혀지고 있다.
3.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홍익대학교 인터넷 커뮤니티 ‘홍익인’을 비롯하여 온/오프라인을 통해 나타나는 홍익대학교 노조 운동에 대한 비판적 시각 중에는 극단적으로 ‘월급 75만원이 부족하다고 시위를 하면 그보다 못한 처지의 분들을 고용하면 되지 않겠냐’는 주장도 있다. 내 개인적 가치관과 상충하는 화가 나는 주장이다. 하지만 나를 무섭게 하는 주장은 따로 있다. 소극적 움직임을 보이는 학생들을 다시 무관심하게 만들거나, 자신의 처음 입장과 반대 방향에 서게 만드는 ‘처음에 소식을 접했을 때는 노동자 분들이 안됐다고 생각했고 화가 났지만 알아본 결과 불법은 아니니 큰 문제가 없지 않냐, 감성에 치우치지 말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는 하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경향신문 DB
앞서 나를 화나게 했던 ‘대체 인력을 사용하면 되지 않나’하는 주장은 주장하는 이가 자신이 옳다 여기는 바를 설명할 나름의 이성적 논리를 지닌, 직관적 판단과 반성 결과가 일치를 이룬 주장이다. 따라서 주장에 진정성이 있다면 그의 주장은 나의 판단과는 상관없이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가치관 중 하나로 인정받아야 한다. 만일 경제 원리 혹은 법리를 중심 가치관으로 가지는 이가 있다면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는 가치관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홍대에 쏟아지는 도덕적 비난은 반박할 필요가 사라진다. 논점을 벗어난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들과 달리 반성과정에서 처음 가졌던 ‘문제의식’을 법적인 문제가 없다거나 사회 전반적 현상이라는 이유로 ‘정상’으로 여기는 입장은 어떠할까.
사람들은 어떤 사건을 처음 받아들일 때 직관을 통해 판단한다. 홍익대 노동자 문제를 접한 많은 이들이 느낀 안타까움 혹은 분노는 노동자들의 1달 월급이 알바비보다도 적다는 사실, 학교 다니는 동안 경험한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 노동자들과의 유대감, 홍익대학교의 적립금 상황 등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내려진 직관적 판단으로 많은 이들이 공감한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직관적 판단 결과는 이성의 반성과정을 통해 이러한 판단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첫인상이라 할 수 있는 직관은 합리적 근거가 부족하고 이성의 활동을 통한 반성이 필요하다. “홍익대학교 노동자들이 받는 대우는 잘못되었다.”고 직관적으로 판단하였을 경우, 우리는 그것이 옳은 판단인지 반성하는 과정을 겪는다. 그 과정을 통해 합리적 언어로 정제되어 타인에게 전달될 수 있는 형태로 변형되고 자신의 의견을 논리로써 타인에게 설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노동자 문제에 대한 반성과정에서 법적 문제를 바탕으로 판단결과를 변경시켰다면 “법적 문제가 없으므로 도움을 줄 필요가 없다.”라는 판단이 도출되고 동일한 논리로 상대방을 설득 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돕고 싶지만 합법적이므로 도울 수가 없다.”고 말한다. 내적 합의를 이뤘다고 생각한 주장에 여전히 대립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논리적 반성을 통해 가치관이 확고히 성립되었다 하더라도 감성적 반성이 다시 필요하다.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믿음’으로 변질된 이성이 행할 수 있는 수많은 악행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경우 개개인의 감성적 판단을 통해서는 불가능하였을 잔혹행위를 민족주의, 우생학, 법리 등 이성의 이름으로 자행된 대표 사례이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사례이고 우리는 이성이 폭주하기 전에 막을 수 있을 거라 쉽게 말한다. 그러나 이성의 이름을 빌린 잘못된 믿음이 우리들의 확고한 가치관으로 자리 잡는다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성의 폭주를 돕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이성이 어떠한 논리가 옳다는 아무리 많은 이유를 말한다 해도 그것이 우리의 감성과 도덕관념에 충돌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재고해봐야 한다. 물론 충돌이 계속된다면 도덕관념 역시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그러한 반성과정 자체의 부재이다. 어떠한 제도도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한 주장 내에서 결점이 없어 보이는 논리도 다른 분야에 적용할 경우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직관의 경우 자신이 살아온 인생 전체가 담겨 있는 만큼 조금 더 신뢰해도 된다 생각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자신을 가지고 토론의 장으로 나설 수는 없을까.
사실, 지금의 20대에게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위해 실정법을 대거 어긴 경험이 있었다.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장’으로 뛰어든, 지금까지의 운동과는 다른 주목할 만한 모습을 보였던 그 사례는 어떠한 변화도 이끌어 내지 못하고 끝났다. 어쩌면 20대가 보여주는 무기력함과 정치혐오는 옳다고 여긴 일을 위해 움직여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일지도 모른다. 홍익대 노동자 문제를 정상이라고 판단할 사람은 극소수 일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마치 이성의 탈을 쓴 맹수가 되기를 장려하는 듯 타인을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 사람들에게 도덕을 외치는 것은 메아리 없는 외침이 되는 것만 같아 두렵다. 소극적 정치적 입장에 힘을 실어주는 실정법을 벗어나지 않기에 문제가 없다는 믿음을 넘어, 자신이 옳다고 여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많기를 바란다.
4.투쟁을 현장을 넘어, 하나의 ‘장’으로
노동자 문제에 적극 동참하는 이도 그렇지 않은 이도 드물게 동감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지금 행하고 있는 노동 운동이 캠퍼스를 이용하는 이들에게 불편을 준다는 사실이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노동자들이 점거하고 있는 학생처(?)는 노동자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위를 계속하기 위해 필요한 곳이다. 반면 그 외의 현수막, 선전전 등 모든 장치, 활동은 노동자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부 결집력을 높이는 역할 역시 무시할 수 없지만,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강자에 맞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가 필수적이다. 노동자들의 노력은 관심과 참여를 잘 이끌어 내고 있을까.
민주노총을 주축으로 한 홍익대 시위 현장은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데 성공했다. 민주노총은 점거농성을 1달 넘게 지속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노동자들의 노력은 많은 이들의 노동자 문제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대중의 관심이 참여로 이어지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만 생각하기 힘든 것 역시 사실이다. 외부로 공개되는 시위의 목적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참여를 유도하는 것, 적어도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일, 시위활동이 대중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면 그래서 행동에 대한 반대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안하느니만 못한 헛고생이 될 것이다.
홍익대학교 내부에만 국한하여 보면 노동자 투쟁은 민주노총이라는 세력이 없었다면 시작도 못하고 주저앉았을 가능성이 큰 운동이다. 동시에 민주노총의 투쟁방식이 홍대생들의 참여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학교 곳곳에 걸린 누덕누덕한 현수막은 흉물스러워 보일 수도 있고, 누군가 ‘위협적’이라고 말한 빨간 조끼를 입고 ‘투쟁’과 ‘쟁취’을 외치는 시위현장은 시청각 공해도 다가갈 수 있다. 이러한 공해가 주는 즉각적인 불쾌함은 정치에 무관심한 학생들의 입에서 ‘외부세력’이라는 지극히 정치적인 발언이 나오게 된 계기라 할 수 있다.
노동운동을 포함하여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수많은 노력들은 지금까지 비슷한 유형의 운동방식으로 사회를 변화시켜 왔다. 그러나 운동방식만큼은 한 세대가 넘는 세월이 지나도록 변화하지 않는 것 같다. 시위현장에서 불리는 노래의 스타일은 ‘고전’이 된 민중가요들의 복제품처럼 변함이 없다. 시위 형식에 하나의 규범으로 작용할만한 가치가 존재하는 것일까. 시대도, 사람도 변하였는데 같은 방식의 운동으로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것은 한계가 있다 생각한다. 시위 현장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비단 홍익대학교뿐만 아니라 철거촌, 공장 등 처우 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되는 곳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은 시위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지금의 대학생들은 과거의 대학생보다 노동문제 등 자신과 밀접한 정치 현안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떨어진다. 이는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노력의 결과로 눈에 보이는 곳만큼은 큰 문제들이 줄어든 것과 대학생들의 취업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바빠진 것 모두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을 뺏기려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민주화 이후의 세대인 만큼 획일성에 대해 경계하고 개인으로서 자신을 중시하는 경향이 크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과거와 동일한 방식의 누군가 앞서서 나가고 그 뒤를 따르는 방식의 운동방식은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지금 정치 운동 현장에 필요한 것은 하나의 ‘장’이라 생각한다. 지나치게 형식화되고 고착된 운동방식에는 참여하기 거부하지만 스스로 느낀 문제들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모일 수 있는 ‘장’이다. 어떤 뜻을 실행하기 위해 더럽혀지는 곳이 아닌 채워지는 장소, 뜻을 같이하는 사람도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곳이 아닌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장소, ‘투쟁의 장소’가 아닌 ‘문화 창조의 장소’이 될 수 있는 장이 될 수는 없을까. 점점 형식화 되어가는 지금의 시위 방식은 끊임없이 소모할 뿐 어떤 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
지금의 대학생은 어느 시기의 대학생보다 많이 공부하는 바쁜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동시에 어느 시기의 대학생보다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다. 문화가 익숙한 이들에게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바를 펼치는 것이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일임을 깨닫게 할 수는 없을까. 지금 홍대에서는 시위현장을 창조의 현장으로 바꾸려는 젊은이들의 작지만 의미 있는 움직임들이 보인다. 누군가 먹고 사는 절실한 문제에 너무나 가볍게, 낙관적으로 접근하는 것 아닌지 의문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너무나 절실하기에 이러한 주장이 필요하다. 홍익대학교가 노동자 문제를 잘 풀어내고 동시에 운동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는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직접고용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홍익대학교는 노동자 간의 협상 불가 방침을 고수하고, 차기 선정될 유력 용역업체로부터 노조 개인들에게 회유 전화가 온다는 말이 들리며, 학생회는 조성되지 않은 여론 따라 어떠한 행동도 적극적으로 조성하지 않고 있으며, 적지 않은 학생들은 노동자 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보이지 않는 2011년 2월, 아직 홍대에 봄은 찾아오지 않았다.
'일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국이 조국의 미래를 말하다(질문과 답변) (3) | 2011.03.04 |
---|---|
혁명의 두 얼굴 (2) | 2011.03.02 |
자율고 개선방안을 통해 본 그들의 ‘상식’ (2) | 2011.02.21 |
국내 대학 등록금? 다 나한테 물어봐 (2) | 2011.02.21 |
[기고]인권위 떠나는 ‘인권지기’ 인영과 태영 (0) | 2011.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