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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상쾌한 날이었다. 당분간 미세먼지 걱정 없다는 일기예보에 마음이 들떴다. ‘이런 게 바로 5월 날씨지’ 싶어 창문을 활짝 열고 만끽하며 달렸다. 거의 다 왔는데 갑자기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한 달여 전, 점심을 먹고 나왔는데 온 거리를 뒤덮고 있던 화학 공장 화재 연기와 비슷한 색깔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어디선가 연기가 날아온 것이었지만, 지금은 발화점이 바로 내 눈앞에 보인다는 거였다. 뭔가 불길했지만 ‘재난문자도 안 왔으니 괜찮겠지’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차에서 내려보니 상황이 심각했다. 일단 연기의 규모가 엄청났고, 냄새가 났으며, 화재 지점 길 건너 1㎞ 반경에 위치한 사무실에서는 창문을 닫았는데도 매캐한 탄내가 계속 났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괜히 왔다 갔다 하면서 뉴스를 검색해보고 서랍에 놔뒀던 마스크를 쓰는 것이 전부였다.

마침 주말부터 이어지고 있는 ‘디아스포라 영화제’가 한창이었다.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 중인 건물에 들어섰더니 연기가 훨씬 가깝게 잘 보였다. 커다란 배의 선미에서 시커먼 연기가 말 그대로 ‘맹렬하게’ 뿜어져 나와 신포시장 방향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모든 창문을 꼭꼭 닫고 물에 적신 휴지로 창문 틈새를 막아놓기까지 했건만, 실내에서도 매캐한 연기 냄새가 느껴졌다. 마스크를 했는데도 머리가 아프고 눈이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관할 구청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지만 행동 요령이나 대피 안내 등 어떤 정보도 제공받지 못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출장이 잡혀 있었다. 탈출하는 기분으로 차에 올랐다.       

어느새 연기는 바람을 타고 내가 가는 시내 방향으로 이동 중이었다. 재난 영화 속 주인공이 허리케인을 뚫고 나가는 기분으로 시커멓고 냄새 나는 연기 속을 헤쳐나가야 했다. 차를 내부 순환 모드로 해놓고 마스크를 벗지 않은 상태에서 최대한 빨리 달렸다. 버스 정류장에서 마스크도 없이 손부채질을 해가며 버스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영화제 관객들에게는 마스크라도 지급됐지만, 길을 지나다니는 주민들은 대부분 무방비 상태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구의 경계를 두 번 지났는데도 안심이 되진 않았다. 그날부터 며칠간 인천 중구는 물론이고 가까운 곳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도 창문을 열지 못하고 독한 냄새를 맡아야 했다. 타이어 타는 매캐한 냄새가 꽤 떨어진 지역까지 퍼진 탓에 화재 오인 신고가 빗발쳤다고 한다. 대피하지도 못하고 가게를 지켰는데도 손님이 뚝 끊긴 자영업자들의 피해도 컸다. 그런데도 인천시에서는 “중구 항동 선박화재 및 다량의 연기가 발생. 인근 주민은 안전에 주의 바랍니다”란 재난 문자 한 번 달랑 보내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나마 한 일인 재난문자도 화재 발생 3시간 후에나 도착했다. 뉴스에서는 “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한 줄로 모든 것이 처리됐다. 화재 발생 사흘째 되는 날에는 화재 선박의 상부를 개방하면서 그 안에 갇혀 있던 연기가 순식간에 방출되기까지 했다. 사전 경고도 없었다. 개방 후에 도착한 재난문자 내용은 “외출 자제 및 외출 시 마스크 착용 바랍니다”가 다였다. 화재 진화 정도에 대한 뉴스는 나왔지만 그게 전부였다. 화재가 난 곳에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마스크를 쓰거나 최대한 돌아다니지 않는 것 외에는….

심지어 시는 화재 다음날, ‘인천항 주변 황산화물(SO2) 등 기준치 이내 측정’이라며 대기 질에 이상이 없다고 엉뚱한 발표를 했다가 뒤늦게 수정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조사 결과 차량 1400여 대가 불에 타면서 미세먼지는 7배, 복합악취가 3배, 중금속은 25배에 달하는 등 인체 유해물질이 다량 검출됐다고 한다. 이후에도 하늘을 뒤덮은 연기가 인체에 유해하지 않은지, 어떤 물질이 타고 있는지 등 정작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알아야 하는 부분에 대한 정보는 전달되지 않았다.

서구 이레화학 화재와 인천항 선박 화재는 두 달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일어난 대형 사고들이다. 그때마다 마스크를 쓰거나 발을 동동 구르는 거 외에는 속수무책이었던 시민은 그저 답답할 뿐이다. 연기만 봐도 화들짝 놀라는 요즘, 최소한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게 됐다. 정부의 대처를 믿고 기다리는 대신 내가 알아서 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번 대형 선박 화재가 남긴 가장 큰 교훈이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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