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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10년 전 제5회 지방선거가 있었다. 흔히 명명되기로 ‘무상급식 선거’였다. 무상급식 공약이 그야말로 전국을 휩쓸었다. 선거 구도가 무상급식에 대한 찬반 여부로 선명하게 나뉘었고, 나아가 ‘보편적 복지 대 선별적 복지’의 구도로 확장됐다. 한국 사회의 패러다임에 관한 논쟁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애초 당시 여당(한나라당)에 유리할 것으로 전망됐던 선거 결과는 ‘야당 승리’로 정리됐다. 무상급식을 전면에 내건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며 한국 사회는 보편적 복지의 시대로 패러다임 전환을 시작했다. 

선거의 제1기능은 물론 누군가를 뽑거나 뽑지 않는 것, 즉 선출이다. 하지만 제5회 지방선거가 잘 보여줬듯 선거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계기로서 탁월한 기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정치인과 정당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책 공약으로써 제시하고 논쟁하며, 시민들은 여론과 투표로써 특정 방향을 승인한다. 전체 시민의 의사가 득표수로 명확하게 표현되는 선거의 특성이 이를 가능케 한다.

그래서 정책 논쟁 없는 선거는 그 결과와 상관없이 뒷맛이 찝찝하다. 정권 수호든 심판이든 정치적 결과를 이뤘을지 몰라도, 시민들이 무얼 원하며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지를 확인하고 합의하지 못한 선거는 반쪽짜리에 그칠 수밖에 없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지금,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단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역시 불평등 문제다. 이른바 ‘조국사태’를 경유한 지금은 특히 자산·세습의 불평등 문제가 그렇다. 지난 수십년간 질주해온 ‘각자도생의 신화’를 멈춰 세우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최선의 타이밍은 지금이다.

그런데 거대 양당이 내놓은 ‘1호 공약’을 보면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1호 공약은 단순한 공약을 넘어 그 정당이 지향하는 사회를 보여준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텐데, 이들의 공약에는 아무런 시대정신도 보이지 않는다. 공공 와이파이 확대(더불어민주당)나 공수처 폐지(자유한국당) 같은 것들이 1호 공약으로 발표되는 풍경을 보고 있자면 ‘조국사태’로 그렇게나 시끄러웠던 작년이 마치 꿈처럼 느껴질 정도다. 

정의당의 1호 공약은 드물게 흥미로운 공약 중 하나다. 청년기초자산제, 만 20세가 된 모든 청년에게 3년에 걸쳐 1000만원씩 총 3000만원을 ‘기초자산’으로 지급하겠다는 정책이다. 청년들이 이 기초자산을 대학 학자금, 주거비, 초기 창업자금 등으로 활용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정의당은 극심해진 불평등에 대처하기 위해 이 정책을 내놓았다고 강조한다. ‘부모 찬스가 아니라 사회 찬스’라는 말로 요약되는 이 정책은 소득 격차를 넘어 자산 격차를 쟁점화하며, 불평등 해소의 책임이 국가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물론 냉정하게 평가하면 청년기초자산제의 정책 설계가 완벽하다고 할 수만은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한 청년에게 3000만원을 지급한다고 만연한 불평등이 단번에 해소되진 않을 것이다. 오늘날 불평등이 청년 세대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십수조원에 달하는 현금이 갑작스럽게 시장에 유통되어 발생할 경제학적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결국 그 막대한 돈이 사학재단과 건물주에게 흘러가 그들 배만 불려주는 것은 아닌지도 우려된다.

하지만 이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의당의 청년기초자산제를 단지 ‘불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매개 삼아 치열하게 논쟁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것은 이 정책이 상징하는 패러다임의 전환 때문이다. 더 이상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없으며,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고, 그 책임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에 있다. 이 명료한 아이디어가 영원한 상식이 되는 새로운 시대의 출발점으로 이 공약이 논쟁되기를 기대한다. 제5회 지방선거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날 책임 있는 그 어떤 정치세력도 무상급식에 반대하지 않게 되었듯이.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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