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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1985)는 유사 이래 여성이 어떤 일을 담당해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21세기 후반 환경오염과 전쟁으로 출산율이 급감하자 남성들은 길리어드라는 전제국가를 건립하고 여성들을 잡아다가 네 부류로 나눈다. 아내, 하녀(집안일), 시녀(대리모), 그리고 비여성. 불임의 ‘아내’를 대신해 아이를 갖도록 강제된 ‘시녀’는 고위층 부부에게 자궁을 제공한다. 가사일을 담당하는 하녀들은 ‘아주머니’라 불리며 ‘시녀’를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출산과 가사,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비여성’들은 콜로니라는 게토에 갇혀 독극물을 처리하는 강제노역에 종사한다. 작년 드라마화되어 인기를 끌었고 또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미국 여성들이 낙태금지법안에 맞서 붉은 망토를 입고 “마거릿 애트우드를 픽션으로 돌려놓으라(Make Margaret Atwood fiction again)”고 외치며 시위를 벌여 더욱 화제가 되었던 책이기도 하다. ‘자궁의 공공화’를 둘러싼 이 기묘한 이야기가 21세기 현실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경악은 단지 미국 여성만이 아니라 ‘전국가임여성지도’를 지닌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여성의 노동은 저 <시녀 이야기>의 분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19세기 이후 여성은 법적 지위가 향상되는 것에 더불어 공적인 경제활동을 하게 되었으나 임금격차나 유리천장 등에서 보듯 현저한 남녀차별을 겪고 있다. 또한 여전히 ‘섹슈얼리티’를 부수적이며 함축적인 노동수단으로 제공해야 하는 이중노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송충이 잡는 일을 하면서 감독에게 몸을 바쳐야 했던 극빈층의 복녀를 그린 김동인의 <감자>에서부터 지주의 성적 유린, 방적공장 감독의 유혹에 시달리는 여성 ‘선비’를 그린 강경애의 <인간문제> 등 문학작품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근 미투 운동이 폭로하고 있는 직장 내 성희롱, 성폭력, 위력에 의한 성범죄 등은 이렇듯 ‘(여성)노동’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삭제하지 못한 남성지배구조의 장구한 역사에 대한 뚜렷한 증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연’에 기초한 성별 분업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은 남성노동으로 가정된 노동의 변화를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즉 산업화와 첨단 기술에 의해 남성 육체노동 대부분이 기계화되고 사무직과 서비스직으로 이동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4차 산업혁명 이후의 ‘노동의 미래’는 기존 성별 분업의 해체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의 가사·육아 분담, 그리고 가사노동의 외주화는 임신과 출산의 기술적 진보, 돌봄로봇, 섹스로봇 등의 확산(‘킹키스 돌스’라는 섹스 인형 대여업소는 작년 토론토에 섹스 인형 성매매 업소 1호점을 열었다고 한다) 등으로 이어져 다양한 대체노동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신의 영역에 진입한 호모사피엔스는 유발 하라리의 말대로 “나, 너, 남자, 여자, 사랑, 미움이 완전히 무관해지는” 특이점을 지나게 될 것인가. 이 포스트휴먼의 노동의 미래가 왠지 미심쩍은 것은 기술의 진보를 의심해서가 아니다. 그보다 유사 이래 희소성을 둘러싼 정치경제학이 더 강력한 현실을 만들어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완전정복은 ‘노동 민주화’ 대신 민족, 인종, 성을 둘러싼 다양한 차별적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재 기술·자본력을 갖지 못한 많은 영세업체들(가구공장 등 위험한 산업현장)이 여전히 육체노동을 이주노동자에게 외주화하고 있듯이 기술에 의한 젠더 해체와 노동혁명은 환상에 불과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돌봄과 가사 노동의 다양한 아웃소싱(홍콩에서 가사나 육아 도우미로 일하는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여성)이나 결혼이주여성의 연쇄사슬(베트남 오지의 총각은 한국으로 시집간 베트남 여성 대신 캄보디아 등으로부터 ‘아내’를 공급받고 있다고 한다), 성매매와 대리모로 생계를 부양하는 하층 여성 등을 흔히 본다.

첨단 기술과 4차 산업혁명에 의한 젠더노동의 대폭발 지점은 지극히 유토피아적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일부 특권층에게나 허용된 꿈이거나 ‘노동의 종말’ 같은 디스토피아의 도래일지도 모른다. ‘인간노동’이라는 거대한 물음 앞에 함께 다다른 우리에게 더욱 시급한 것은 여성 노동의 비전보다 여전히 성적 차별과 계급차별이라는 현실에 갇힌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구원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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