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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미세먼지와 겨울

opinionX 2018. 11. 20. 15:10

일본 삿포로에 다녀왔다. 하얗게 내리는 눈을 보고 싶었지만 머무는 기간 내내 삿포로는 흐리거나 비가 왔다. 그래도 좋았다. 눈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어도 상쾌하고 청량한 공기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비를 맞으면서 미세먼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게 얼마 만인지! 하지만 이 달콤함도 잠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한국의 하늘은 뿌옇고 노랗고 탁하기까지 하다. 수도권 미세먼지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의심받는 ‘영흥 화력발전소’ 위를 지나갈 때는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일본에서 출발할 때의 하늘과 도착할 때의 하늘 색깔이 너무 다르다는 것에 새삼 놀라고, 내가 마셔야 할 공기가 저 탁한 공기라는 것에 씁쓸해진다.

한국에서 출발하는 날에도 미세먼지가 심해서 안개와 미세먼지가 뒤섞여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돌아오는 날 역시 마찬가지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잠시나마 북해도의 파랗고 쾌청한 공기를 마음껏 누리다 와서 그런지 인천공항에 도착해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진다. 아무리 자주 겪어도 이 탁한 공기에서 맡아지는 비릿한 쇠냄새만큼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다. 비행기에서 봤던 거대한 먼지 띠가 도시 위를 두르고 있고, 바다 위를 달리는데도 시야가 흐릿하다. 게다가 분명히 ‘미세먼지 나쁨’ 예보가 떴는데도 마스크를 쓴 사람이 드물다. 오히려 공기 질과 상관없이 마스크를 일상적으로 하고 다니는 일본에서 마스크를 한 사람을 더 많이 마주친 느낌이다.

날씨만큼 사람의 기분을 좌지우지하는 게 또 있을까? 나 같은 기분파는 훨씬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기분이 안 좋다가도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우울한 일이 있더라도 금방 괜찮아지지만, 날씨가 이런 상태라면 심란해지기 일쑤다.

허수경 시인의 “태양이 질 무렵 사막에서 일어난 먼지는 태양과 함께 진다”라는 시 구절이 떠오른다. 독일에 거주하던 시인은 “사막에 대해서라면 조금 아는 바가 있다”고 했지만, 한국에 살고 있는 나는 미세먼지에 대해서라면 조금 아는 바가 있다. 아니, 한국에 살다 보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다. 한국은 이달 초부터 열흘 넘게 미세먼지(PM10)와 초미세먼지(PM2.5)가 ‘나쁨’ 수준을 보이고 있을뿐더러 중국발 미세먼지, 디젤차를 독려했던 정부의 실책, 기후 변화라는 3종 세트 탓에 미세먼지는 계절을 막론하고 점점 더 잦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 위로 떨어지는 태양은 아름답기라도 하지 온통 뿌옇기만 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노을 생각은 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한국을 벗어나면 괜찮을까? 당장 공기 질이 좋기로 손꼽히는 캘리포니아조차 이번에 발생해 역대 최대 인명 피해를 낸 대형 산불 ‘캠프파이어’의 영향으로 공기 질이 사상 최악의 수준으로 나빠졌다고 한다. 기후 변화로 가뭄이 심해지면서 이렇게 큰 산불이 났다고 하니, 캘리포니아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북해도 역시 원래 눈이 와야 하는 기간인데, 이상 기후로 눈이 오지 않거나, 오더라도 예전처럼 많이 내리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미세먼지의 습격이 아니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산불이나 폭설 등 다른 형태로 기후 변화의 결과가 나타나고 있으니 한국을 벗어난다고 해도 또 다른 형태의 어려움을 겪으리라는 건 자명하다.

중국의 난방과 함께 찾아올 미세먼지의 공습을 생각하면 추운 게 낫다 싶다가도, 지난해 추위를 생각하면 또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던 먼지 뭉치 캐릭터들처럼 미세먼지들이 인간들을 도와주는 먼지로 바뀌는 신기술이라도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부질없는 생각마저 드는 초겨울이다. 내년 2월부터 미세먼지대책 특별법이 본격 시행되고 범부처 미세먼지 개선기획단도 만들어진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자주 지나다니는 길은 잊어버릴 수 없어. 우리가 잊어버릴 수 없는 이유는 마음속에서 서로 자주 지나다녔기 때문이야.” 허수경의 산문집 <너 없이 걸었다>에 나오는 이 대목을 곱씹으며 생각한다. 지금껏 지나다녔고 앞으로도 자주 걷게 될 한국의 길들이, 풍경들이 뿌연 먼지와 탁한 공기로 기억되지 않기를….

<정지은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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