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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학시험에서 수능 비중이 줄어들고 학생부종합전형이 강화되면서 정시보다 수시에 집중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에 따라 진로 탐색이 활성화되고 체험 학습과 교실 수업에 대한 참여도가 높아지는 등 교과, 비교과 활동 모두에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일찌감치 진로를 설정하여 자신의 활동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부담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입시 전문가들은 이에 편승하여, 중학교 때부터 진로를 준비해야 고등학교에 올라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미리 설정된 진로에 따라 자신의 활동 전반을 대학 전공과 미래 직업에 부합하도록 맞추어 가야 ‘일관된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고등학교 선택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중학교 때부터 적극적으로 진로 탐색을 시작해야 한다. 중학교는 이미 늦고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시작해야 한다는 말까지 돈다. 꿈을 꾸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빨리 꾸는 게 지상과제가 됐다.

하지만 이른 진로 탐색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 세상에는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다. 꿈꿔왔던 일이어도 실제 손발을 움직여서 해보면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 잠시 해보는 것과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아무리 자기가 좋아서 선택한 공부나 일이어도 그중 일부는 어쩔 수 없이 싫은 부분들로 구성돼 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만이 아니라 무엇을 참을 수 없는지까지 아는 것을 말한다. 특정 학과나 직업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말은 그 일의 모든 면이 그렇다기보다 도저히 참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적성에 맞는다는 말 역시 전적으로 만족스럽다기보다 그럭저럭 싫지 않다는 뜻일 수 있다. 어린 나이에 모든 면이 자신에게 꼭 맞는 꿈의 학과나 직업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두 번째, 세상에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자신이 지망했던 학과와 기업이 해당 산업 지형의 급속한 변화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기도 한다. 조선업 관련 마이스터고에 진학한 학생들이 최근에 처한 현실이 그렇다. 조선 업황의 악화로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이들 마이스터고를 졸업한 학생들의 진학 역시 불투명해졌고 관련 학과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조선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제조업 기반이 약화되고 산업의 트렌드가 변화하면서 관련 직업이 사라지는 일이 앞으로도 종종 일어날 것이다. 반대로 머지않은 미래에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완전히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새로운 직업이 생겨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세계의 변화를 개인이 예측해 일일이 전략적으로 대응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세 번째, 세상만 변화하는 게 아니라 시간 속에서 우리 자신도 변한다. 호기심, 열정, 체력이 매년 다르고 관심사도 시시때때로 새로운 방향으로 가지치기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좋아하고 잘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평생 끝나지 않는다. 나이 먹고도 고민이 여전한 건 자기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른도 그러한데 하물며 청소년 시기에 진로 고민을 끝내라는 건 과한 주문이다. 자신에게 적합한 분야를 아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직관과 이성이 충분히 성숙하기 전까지 넓게 탐색할 필요가 있다.

진로 탐색은 양면적이다. 여러 길 중 하나를 선택해 빨리 준비하면 그만큼 깊이 들어갈 수 있겠지만, 그 외 다른 길들은 조기에 닫혀버린다. 변화가 심한 때일수록 개방적인 자세와 유연한 대응이 더 중요해진다. 인생의 특정 시점에 단 하나의 꿈을 정확히 포착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위험하거나 무모한 일일 수 있다.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것과 다양한 길에 자신을 열어두는 것 사이에서 균형이 필요하다.

조기 진로 교육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삶을 마음껏 기획할 수 있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진로 교육의 당사자인 학생들은 지금 어느 때보다 더 분노하고 있다. 이 나라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비선 실세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실 세상에는 행복해질 수 있는 무수히 다양한 방법이 있다. 전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을 찾아 나갈 수 있는 소질이 우리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있다. 다만 전제 조건이 있을 뿐이다.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며 차별 없는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더는 꿈을 꾸고 이루는 게 소수의 특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김성찬 |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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