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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믿는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에 나오는 말이다. 2008년 이후 지금까지 정말 많은 음모론이 있었다. 최근 곰탕 암호설에서부터 세월호 인신공양설, 천안함, 국정원 댓글 사건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소외에 기생하는 음모론의 생산이 현대사회의 복잡한 시스템에서 소외된 현대인의 운명이라고는 하지만, 이토록 많은 음모론은 2008년 이전에는 한국사회에서 접한 적이 없었다. 왜 그런가?

<음모론의 시대>의 저자 전상진에 의하면, 음모론은 일종의 신정론과 유사한 기능을 한다. 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신정론은 기대와 현실의 간극을 메우려는 문화적 노력이고 음모론은 종교가 퇴색한 이 시대에 그 기능을 대체하는 일종의 세속적 신정론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고통을 감내할 수 있지만, 그 고통을 이해하지 않은 채로 두지는 못한다. 즉 고통스러운 현실은 신의 뜻이든 무엇이든 반드시 이해가능한 질서 속에서 ‘의미’화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 그토록 많은 음모론이 양산되고 회자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이 미스터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현실의 간극에 대해 투명하게 밝혀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도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월호 7시간의 사실내용을 말하는 대신 외신기자를 고소하고, 연예인들의 스캔들을 폭로하고, 검찰총장의 자격을 논하고, 문건유출 경로를 따지고, 국정원 여직원 인권침해를 얘기하고, 개헌을 언급한다. 그리고 모두 한목소리로 “모른다”를 외친다. 매스컴 또한 그 “모른다”를 메아리처럼 반복하고, 그리고 침묵한다.

JTBC 손석희 사장

10월24일 JTBC의 충격적인 보도 이후 며칠 동안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종편에서 시시각각 속보를 내보내는 이 난리 시국에 공중파는 정기방송으로 초지일관 태평성대이다. 게다가 뉴스에서는 태블릿PC의 전달자가 사망한 비서관이라는 등의 보도를 흘리고 있었다. 요컨대 공영방송은 이미 공영방송이 아니라 공공성과 공신력은 물론 현장성을 상실해버린 죽은 방송이 되어버린 것이다.

공중파 채널의 추락 이후, 사람들은 오랫동안 TV뉴스를 외면했다. 그리고 신문을 읽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종편과 팟캐스트로 향했다. 몇몇 종편과 팟캐스트는 사실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뛰어넘는 많은 화려한 ‘그림’들을 제공했고, 그 그림들은 의혹을 가진 이들을 솔깃하게 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대개 확인되지 않은 사실과 추정의 세계이고, 때론 의도성 짙은 음모론의 파편들이기도 했다. 요컨대 공중파가 공정한 사실 보도의 책무를 져버린 이후, 우리 국민들은 이제 텅 빈 공론장의 세계를 뒤로한 채, ‘신념윤리’와 이념으로 사유화된 매체들에 둘러싸여 버린 것이다. ‘현실보다는 신념이 앞서는’ 화려한 말들은 솔깃하지만, 그 극단과 추정은 진실에 대한 국민의 의혹과 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

TV 보도에 대한 회의와 염증으로 사람들이 등을 돌릴 때, JTBC의 손석희는 사람들을 다시 TV 앞에 앉게 했다. 그리고 한 진보매체가 밝힌 사실들을 단단한 진실의 세계로 이끌어냈다. 그 진실이 보여준 그림은 충격적이었으나, 음모론이 대신했던 설명보다도 훨씬 더 이해타당한 것이었다.

손석희는 ‘최순실 게이트’ 보도와 관련하여 세 가지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고 했다. “확인된 사실을 보도한다. 의혹 차원이라도 정당한 근거를 가져야 보도할 수 있다. 그리고 잡다한 주변 이슈가 아니라 본질적인 문제를 다룬다.” ‘확인된 사실, 그리고 근거 있는 의혹, 본질적인 문제’ 이 세 가지 원칙은 현재 예능화되어가는 매체언론이 가장 빠르게 버리고 있는 것들이다. 하루 몇 시간씩 ‘수다 떨 수 있는 사실’들은 사안의 무게를 잃어버린 잡다한 사실이 될 수 있으며, 지나친 풍자로 전달된 사실 또한 그 권위와 신뢰를 실추시킨다. 손석희의 뉴스룸이 가장 공신력 있는 뉴스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팩트의 세계를 수다와 풍자에서, 신념윤리의 재단으로부터, 감정의 과잉으로부터 보호했을 뿐 아니라, 누구인지도 기억할 수 없는 아나운서의 알파고적 전달에서도 벗어나 진정성 있는 한 사람의 실체로서 사람에게 이야기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살아나는 ‘사실’과 공론의 힘, 그것이 우리를 무지와 불신으로부터 건져낸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눈멀고 귀먹게 함으로써 이 총체적 난국에 빠지게 했던 그 무지와 불신 말이다. 사람들은 이미 아는 것만을 믿는다. 국민들이 최씨 일가와 박근혜 대통령을 둘러싼 각종 사실들을 몰랐다면, 그것은 그 ‘사실’을 덮고 날조한 매스컴 환경과 그 환경을 창조한 정권의 책임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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