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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을 둘러싼 의문. 움베르토 에코는 어느 강연에서 “옛날 중세 사람들도 <신곡>의 ‘천국편’이 재미없었을까” 물었다. 현대인이 보기에 ‘지옥편’은 흥미진진한데 ‘천국편’은 지루하기 때문이다. 물론 “중세 사람들은 ‘천국편’도 재미있었으리라”는 것이 에코 선생의 결론이다. 명색이 중세 학자니 다른 결론을 내기도 어려웠으리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19세기 말 미국에서 온 호레이쇼 뉴턴 앨런은 <조선 견문록>을 썼다. 당시 지배층 엘리트(우리 식으로 ‘양반’이라 부른다)에게 조선의 볼거리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양반은 ‘학춤’ 공연을 보여주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지루한 시간은 처음이었다”고 앨런은 썼다. 선교사에 의사에 외교관에 브로커까지, 인생이 심심할 틈 없던 앨런이니 학춤 공연이 지루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 한국 사람이 보면 학춤이 재미있을까? 대답은 피하겠다.

나중 사람이 보기에 재미있는 볼거리는 옛날 사람이 보기에도 재미있었던 것 같다. 옛날 사람과 지금 사람의 취향 문제에 대해 나는 생각한다. 왜 이 문제에 매달리는가? 옛날에 그린 나의 만화 <십자군 이야기>를 다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다시 읽으며 “옛날에 재밌던 부분은 지금 보면 재미가 없겠거니” 짐작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재미는 그대로였다. 만화에 담긴 정보의 유용함도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요즘 독자가 보기에는 어려워 보이겠다 싶다. 그래서 걱정이다.

나는 지식만화를 그린다. 과거와 현재를 생각하면 세 가지 고민이 떠오른다. 첫째, 옛날에 재미있던 요소가 지금도 재미있을지? 둘째, 옛날에 유용하던 내용이 지금도 유용할지? 이 두 가지는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시학>이라는 작품에서도 언급했다. “재미와 유용함을 잘 버무리면 작가로서 성공한다”는 조언이었다. 여기에 세 번째 고민을 덧붙이겠다. 옛날에 쉬웠던 설명이 지금도 쉬울지?

내가 만화를 배우며 교과서로 삼았던 작품은 <고우영 삼국지>였다. 고우영 선생과 동시대의 작가분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우영 선생의 만화는 재미있는데 요즘 사람만 알 법한 작품을 패러디하기 때문에 맥락을 모르는 나중 사람이 보면 재미가 떨어질 것이다.” 그렇지는 않다. 지금 봐도 <고우영 삼국지>는 여전히 재미있다. 한때 “<삼국지>를 가장 쉽고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고우영 삼국지>를 읽는 것”이라고 했다. 재미있다는 점은 여전하다. 패러디 원작을 몰라도 웃음보가 터진다. 하지만 쉬운지는 모르겠다. 스크롤 방식의 웹툰이 익숙한 지금 독자가 보기에는 글자가 많고 그림이 술술 넘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옛날에 쉬운 것이 지금은 어렵다. 옛날에 비해 요즘 창작물이 대체로 읽기 쉽고 호흡이 짧기 때문이다. 

재미도 여전하고 유용함도 여전한데 쉬운 것이 어려워졌다니. 과거와 현재만 그럴까? 현재와 미래도 이러할 것이다. 지금 어떻게 그려야 미래에도 쉽고 편안하게 읽힐까, 나 같은 만화가는 고민이 깊다.

<김태권 만화가>

 

 

연재 | 창작의 미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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