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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본법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을 때, 국회에서 청년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하자며 청년미래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청년 당사자들과 토론회를 연 적이 있다. 기회가 좋아 나도 참관했다. 결국 청년기본법은 우여곡절 끝에 올해 초 통과되었고 8월 시행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날 나는 청년기본법이 통과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절망감을 조금 느꼈다. 청년에 대한 공감능력이 전혀 없는 한 의원을 그 자리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청년은 어떻게 이 사회를 체감하는지, 어떤 제도가 필요한지 진지하게 입법권자에게 전달하러 온 청년 당사자들을 앞에 두고, 그 의원은 듣기도 부끄러운 본인의 성공 신화를 늘어놨다. 시골에서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본인은 열심히, 좌절하지 않고 노력한 끝에 국회 의원회관 한가운데 이렇게 앉아 있다고. 혹시나 청년들이 그 대단한 스토리에 졸지는 않을까 호통까지 치면서 말이다. 나를 비롯해 토론회를 참관한 청년활동가들은 이미 닳고 닳아 유머로 전락해버린 의원님의 ‘라떼는 말이야’ 신화에 작은 웃음 하나 짓지 않았다.

1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지금에야 꺼내놓는 이유는, 최근 이 사람이 강원랜드 채용청탁 혐의로 1년 실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염동열 의원은 지지자 자녀 등 52명이 기재된 명단을 줘 강원랜드에 채용되도록 청탁했고, 재판부는 이 혐의를 인정했다. 청년미래특위가 출범했을 때, 염동열 의원은 이미 청년참여연대로부터 채용청탁 혐의로 고발당한 상태였다. 청년문제를 해결하자는 자리에서 과거 경험을 들먹이며 청년에게 호통을 친 것도 우습지만, 애초에 청년에게 박탈감을 안겨준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부터 말이 안됐다. 그리고 며칠 전 이보다 더 좌절스러운 뉴스를 들었다. 청년참여연대가 염동열과 함께 고발한 권성동의 무죄 선고 뉴스다.

강원랜드 채용청탁 혐의를 받는 권성동이 2심에서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5일 전의 일이다. 재판부는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혐의를 증명하지 못한 것으로 봤다. 맥이 빠지는 건 법의 테두리로 채용청탁을 처벌할 수 없어서다. 사실 고발 내용도 채용청탁이 아니었다. 채용청탁이라는 처벌 사유는 없다. 청년과 강릉 시민의 박탈감을, 업무방해 및 직권남용 혐의 고발로 표현할 수 있을 뿐이었다. 채용비리를 근절하고 채용절차를 공정하게 만들기 위한 대안도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다. 블라인드 채용 의무화. 아무리 학교 이름을 가리고, 부모님이 누구인지 밝히지 못하게 한다고 해도, 이미 ‘세습 중산층’ 사회가 된 이곳에서 지원자의 삶의 경력은 좋은 지연과 정보를 가진 부모님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 처벌받길 원했다. 지금껏 인맥을 이용하는 행위는 ‘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좋은 일자리’를 갖는 것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휴게시간, 출퇴근 시간도 보장받지 못하며, 월급이 안 밀리는 것이 다행이거나, 재계약이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삶. 위험한 작업장에서 다쳐도 산재를 증명하기 어려운 노동도 허다하다. 그렇게 일해도 내 몸 누일 방 하나 구하기 어렵다. 그러나 ‘좋은 일자리’ 하나를 가지면 그다음을 보장받는다. 인맥을 이용한 ‘중산층 세습’은 우리 사회에서 조금 더 안정적으로 살기 위해 누구나 해온 일이다.

KT에 딸의 채용을 청탁한 의혹을 받는 김성태 의원은 “딸에게 파견 계약직을 권하는 아버지가 몇이나 있냐”고 말했다. 파견 계약직 노동의 불안을 알고서 한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해야 할 건 이것을 논거로 채용청탁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일자리를 갖더라도 좋은 삶, 안정된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드는 일이었다. 청년은 삶을 낭떠러지로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언제까지 경쟁하고, 평등하지 않은 공정 아래 내일을 불안해해야 하는 걸까. 법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도 많다. 오늘도 정의는 지연되고 있다.

<조희원 청년참여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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