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친구 집에 저녁초대를 받아 갔습니다. 보안경비가 좀 유난하다 싶기는 했지만, 단지 자체에 체육시설은 물론 넉넉한 산책공간까지 확보한, 쾌적하고 고아한 한강조망권의 아파트에서, 풍성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막 디저트가 나오던 참이었습니다. 주방 쪽에서 쿠루룩 쿡쿡 소리가 나서 누군가 싱크대에서 재미난 소리가 나네? 말하는 순간, 개수대에서 물이 솟구치는 것이 보였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분수처럼요.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번진 걸 보기 전까지는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았어요. 그곳은 22층이었으니까요. 그 누구도 그 높은 곳에서 역류하는 하수 분수를 보게 되리라 상상 못했을 겁니다.

싱크대 문을 열어보니 하수관과 호스의 연결 부위 틈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흘러내린 물은 금방이라도 거실 카펫까지 진격할 태세였죠. 일단 양손으로 틈을 막아보았지만 온전히 다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32층 건물이었으니 위로 적어도 열 세대. 시간은 마침 저녁식사 때. 우리처럼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딱 설거지를 하고 있을 타이밍. 주먹으로 제방이 무너지는 걸 막아 마을을 구했다는 그 유명한 네덜란드 소년처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동네 사람들, 제발 설거지 좀 멈춰주세요, 여기 물이 새고 있어요!

다른 수가 없었어요. 설거지 타임이 끝날 때까지 열심히 물을 퍼 담는 수밖에. 제방 구멍을 막은 손의 힘이 풀리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난 후, 관리실 사람이 와 응급처치를 해주었지만, 그 아름다운 디저트는 결국 먹지 못했습니다. 대신 위층 사람들의 설거지물이 대략 몇 양동이쯤 되는지, 그 냄새가 어떠한지 알게 되었죠. 그 단지의 사람들이 대부분 음식물분쇄기를 달았다는 것은 관리실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청결과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음식물분쇄기의 문제점은 익히 들어왔지만, 그 피해를 이렇게 온몸으로 맞게 될 줄이야.

어릴 적 단층 주택에 살 때 비슷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긴 합니다. 아주 오래전이죠. 그땐 지금보다 훨씬 자주 장마철에 집이 물에 잠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밖에서 밀고 들어오는 것보다 안쪽 하수구에서 역류하는 빗물을 퍼내는 게 일이었죠.

한 편집자를 만났었는데요, 그녀는 자신의 20대는 옥탑과 반지하의 시절이라고 규정하더군요. 여름이면 도서관에 가서 잘 수밖에 없었던 옥탑방의 시간과, 하수구는 물론이고 변기에서조차 무언가가 솟구치는 반지하방의 시간들. 변기에서 뭐가 튀어 나왔는지는 차마 전달하지 못하겠습니다. 무언가 살아 있는 생명체였다는 것만 밝혀두죠. 그녀가 말하길, 역류하는 하수구를 피해 옥탑으로 올라갔더니 용광로가 기다리고 있더라, 하더군요. 우리는 한동안 하수구냐 용광로냐를 놓고 저울질을 했습니다.

상상 못한 아파트 22층 하수 역류
음식물분쇄기가 부른 참사였다
흘려보낸 물 속 수많은 찌꺼기들
그걸 먹을 생명체들을 생각하
며제방이 무너지기 전 ‘바꿔야 한다’

하수구 역류는 지상에 가까운 집들의 문제인 줄로만 여겼습니다. 물탱크에서 하수구 문제를 고민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하수구 냄새는 아래로 번지는 게 아니라 위로 향한다. 제가 깨달은 물탱크 과학입니다. 세면대·개수대·싱크대, 하수관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구멍에서는 다 올라오죠. 하수 배수와 관련된 정말 다양한 상품들과 관련 업체들이 있더군요. 역류·막힘·뚫음, 온갖 방식의 하수구 트랩과, 냄새 차단·벌레 차단·완벽 차단. 하지만 완벽한 차단이란 불가능합니다. 냄새니까요. 뭘 더 알아보다가 그냥 물을 쓰고 난 후 구멍을 막아버리기로 정리했습니다. 냉장고 문은 빨리 닫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일주일 후 친구 집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다음날 또다시 역류현상이 발생했고, 전보다 신속하고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었고, 후에 업체를 불러 하수관을 뚫었으나 소용이 없었고, 결국 단지 차원에서 공사를 하고난 후 마무리되었다는 얘기. 그러면서 이제는 무심코 흘려보내던 생활하수에 조심스러워졌다는 덧붙임.

뒤늦게 떠올렸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흘려보낸 물들에 뭐가 들어 있을지. 보디클린저에 포함된 각질제거용 알갱이와, 김치찌개의 고춧가루와 그 밖의 온갖 양념들과, 거름망을 깨끗이 하기 위해 흘려보냈던 찌꺼기들을. 그리고 그 물이 가 닿을 곳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하수관 안에서 쌓여 관을 막지 않고 잘 흘러갔다면 도착했을, 그래서 결국 그걸 입으로 다 받아먹을 수밖에 없는 생명체들에 대해.

그 순간 콧구멍에 빨대가 꽂힌 채 신음하는 바다거북이 떠올랐고, 배안에 플라스틱을 가득 담고 다닌 상어가 생각났습니다. 미세플라스틱이 내장은 물론 뇌에까지 침전된다는 연구결과도 있었죠. 참 문제야라고 생각했지, 그 고통을 체감했다 자신 있게 말 못하겠습니다. 당장 내 입에 들어오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뭐, 물을 깨끗이 쓰자고 말할 참이냐고요? 어찌 그리 하겠습니까. 그저 네덜란드 소년의 기도하는 마음으로다가, 이 제방이 무너지기 전에, 뭐라도 좀 바꿔 봐야 하지 않나, 혼자 다짐을 해보는 것입니다.

천운영 소설가

 

[천운영의 명랑한 뒷맛]이 거리의 웅변대회

입이 쩍 벌어졌다. 괴뢰, 만행, 박살, 쳐부수자. 이런 단어들의 조합이 플래카드로 걸리게 될 줄은 정말 몰...

news.khan.co.kr

 

[천운영의 명랑한 뒷맛]태풍이 지나간 후, 지붕 위에서

지붕 위 작은 방에 대한 동경은 언제부터였나. 아마도 <소공녀>. 그중에서도 반복해서 읽던 장면은 다...

news.khan.co.kr

 

[천운영의 명랑한 뒷맛]집으로

서울은 집값 많이 올랐지?수년 만에 만난 친구의 첫인사 장마철 배추값 얘기 소용 없어서울 어디 아파트 한...

news.khan.co.kr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