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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부자가 있었다. 아비 도둑의 기술을 열심히 배운 아들 도둑이 다른 도둑들의 칭송에 자신이 최고인 양 우쭐해했다. 아비 도둑은 “아직 멀었다. 스스로 터득한 것이 아니지 않으냐”라고 말했지만 아들 도둑은 건성으로 들어 넘겼다. 어느 날 아비 도둑은 아들 도둑이 보물을 챙기는 동안 창고 문을 밖에서 잠그고 가 버렸다. 갇혀버린 아들 도둑은 쥐가 물건 갉는 소리를 내서 주인이 쥐를 쫓으려 문을 여는 순간을 이용해 빠져나왔고, 돌을 연못에 던져 물에 뛰어든 것으로 위장함으로써 가까스로 도망쳤다. 자신을 원망하는 아들에게 아비 도둑은 말했다. “남에게 배운 기술은 한계가 있지만 마음으로 터득한 것은 무궁하게 응용할 수 있는 법이다. 너를 궁지로 몬 것은 너를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서였고 너를 함정에 빠뜨린 것은 너를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이제 너는 천하제일의 도둑이 될 것이다.”

ⓒ 경향신문DB

강희맹이 아들에게 준 글이다. 왜 하필 도둑 이야기일까?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다. 세대가 다르고 관심과 바람이 다른 부모와 자녀가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기란 쉽지 않다. 강희맹은 이 글을 쓰면서 “과감하게 직접 훈계하지 않고 속된 이야기를 통해서 뜻만 살짝 내비친 것은, 부모 자식 간에는 말을 부드럽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각자의 의도와는 달리 깊은 상처를 주기 쉬움을 경계한 것이다.

강희맹의 집안은 대대로 고관을 지낸 명문가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남들이 치켜세워주는 대로 기고만장하다가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올 때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 것임을 잘 알았다. 어려움 없이 자라 이미 세상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자녀에게 도둑 부자 이야기를 건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굳이 일부 재벌가의 추문을 떠올릴 것도 없이, 부와 교육의 세습이 점차 고착화되면서 어려움을 딛고 터득한 실력이 아니라 좋은 환경에서 잘 배운 덕분에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아비 도둑처럼 자녀를 일부러 곤경에 밀어 넣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곤경 가운데 스스로 터득하는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낮은 자리에 거하며 내면의 실력을 다져가라는 권면은 오늘 우리의 자녀에게도,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도 유효하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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