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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스토커에게 시달렸다. 스토커는 그녀의 전 남자친구로 그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출몰했다. 그녀는 전 남자친구가 자신의 자동차에 GPS추적기를 심어놓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몇몇 자동차정비업소에 의뢰했지만 GPS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그 분야 전문가를 찾아가서야 GPS를 제거할 수 있었다. 찾아낸 GPS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초소형 GPS였다. 영화 <다빈치코드>의 랭던 박사로 나오는 톰 행크스조차도 자신의 재킷에 GPS가 넣어졌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니, 10여년 전 영화 개봉 당시만 해도 그런 유형의 초소형 GPS는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현실에서 이미 그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GPS가 우리의 일상에 들어오면서 프라이버시와 프라이버시의 한계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2012년 경찰이 용의자의 차량에 GPS를 부착해 위치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부당한 수색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중요하다고 본 셈이다. 하지만 구글의 에릭 슈미트 회장이나 페이스북의 저커버그는 한목소리로 프라이버시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에 대한 대비책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이미 GPS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웨이브버블, 즉 전파거품이라는 도구가 존재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웨이브버블을 소지할 경우 반경 수㎞ 이내의 전파신호를 방해, 개인의 프라이버시 한계를 넘어서버리는 게 흠이다. 위치추적을 당하고 있는 범죄자가 우연히 웨이브버블을 소지한 사람과 같은 쇼핑몰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갑작스럽게 GPS수신기의 교란으로 경찰은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혹은 웨이브버블 소지자가 승선한 거대한 크루즈가 폭풍우와 번개를 맞는 상황이라면, 수백 아니 수천명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켜야 할 GPS 등 각종 항법장치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 런 이유들 때문에 사실상 미국에서는 웨이브버블 소지가 법적으로 금지돼 있다.

위성항법장치(GPS)에 이용되는 항법위성_경향DB


GPS스푸핑이란 방법도 있다. 스푸핑이란 글자 그대로 ‘속인다’는 말이다. 이는 GPS 신호를 조작해서 위치를 위장해, 신호가 유효한 진짜 신호를 납치해서 GPS송신기를 교란시키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해킹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GPS 신호를 변조할 수 있는 도구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GPS스푸핑을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사용할 수도 있지만, 항공기·자동차·드론 등에 사용되는 GPS 위치를 가로채서 가짜 신호를 전달하게 된다면, 심각한 상황도 맞이할 수 있다.

GPS는 오차범위가 ㎝ 단위 수준으로 진화하고 있다. 지금처럼 프라이버시가 큰 이슈가 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GPS는 일반인들에게 아주 유용한 도구로만 인식됐다. 일상 깊숙이 침투한 GPS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내비게이션 없이도 초행길의 목적지를 잘 찾아가고, 미로 같은 고속도로도 무사히 빠져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내비게이션 없이는 아는 길도 찾아가기 힘들다.

여전히 GPS는 향후에도 우리의 삶을 안락하고 편안하게 해줄 것이다. 특히 건망증이 심한 이들은 GPS의 진화를 반길 것이다. 초소형 GPS가 일반화될 경우 스마트폰에 장착한 앱을 통하면 리모컨이나 지갑, 자동차 키 등이 거실 소파나 침대 한 구석에서 대답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GPS는 아니지만 앱을 통해 찾을 수 있는 리모컨도 선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법으로 금지됐다 하더라도 웨이브버블을 소지하는 사람이 생겨날 것이고, 범죄자들이나 해커들이 GPS스푸핑을 통해 어떤 위험한 시도를 할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2011년 미국의 스텔스 드론 RQ-170기가 이란 상공에서 실종됐다. 실종된 스텔스 드론은 어떤 손상도 없이 이란의 국영방송에 등장했는데, 이란 당국은 GPS스푸핑으로 무인기를 나포했다고 밝힌 바 있다.

GPS스푸핑은 이처럼 위협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지난해 열린 국제 해킹보안콘퍼런스(POC 2015)에서는 치후360이라는 중국 IT 보안업체 연구팀이 항공기, 드론 등의 GPS 위치를 가로채는 GPS스푸핑을 시연하기도 했다.

첨단기술은 세계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디지털시대, 그곳에서 시스템들은 너무나 복잡하게 연결된 채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그 속에 내재된 취약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리고 길을 잃은 시대, GPS의 경이로움 뒤에 숨겨진 치명적 위험은 아이러니하게 프라이버시라는 길에서 이탈하고 있는 첨단 디지털시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최희원 | ‘해커묵시록’ 작가·인터넷진흥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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