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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부끄럽구나. 70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는 진정 어른이다. 이 사회,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 중에 나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아들아, 그런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았다. 보릿고개를 다시는 넘지 않게 되었고 헐벗은 강산을 울창하게 만들었다. 경제규모가 세계에서 열 몇 번째를 자랑하며, 뽑고 싶은 대통령을 뽑아본 경험도 가지고 있다. 사회의 민주화가 덜 되었지만, 가난한 이들의 고통이 아직 심하지만 좀 더 열심히 하면 되겠거니 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가 되면, 2만달러가 되면, 3만달러가 되면 이루어지겠거니 했다.

아들아, 지난해 4월16일 큰 배가 가라앉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대부분 고등학생들이었던 승객들이 목숨을 잃는 장면을 세계 주요 20개국 중 하나라는 곳의 국민들이 그들의 거실에 있는 대형 고화질 TV로 여러 방송사가 앞다투며 시시각각 중계하는 보도를 통해 보았다. 보고 있는 거처도, 보도의 매체도, 사고난 배도 다 안락하고 첨단을 자랑하며 성능이 좋은 것이었지만 300명 넘는 이들을 구출하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장면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봐라, 네가 살아온 세월이라는 것을. 너의 관행과 너의 나태와 너의 속성을. 이 큰 배와 그 배를 움직이는 회사와 그 회사를 키운 제도와 그 제도에 근거하고 있는 사회와 그 사회가 나름 자부심을 갖는 발전신화를. 그게 바로 이런 모습이다.”

“부자 되세요”라는 말을 축복이라고 했다. “바보, 문제는 경제야!”라고 말하는 후보자에게 표를 주었다. 이제 민주주의를 말하고 평등을 말하려면 왠지 주눅이 들었다. 정의는 후진 개념이었다. ‘우리’라는 말은 ‘끼리’라는 말이었다. 나는 나고 너는 너였다.

교보문고에 전시된 세월호 관련 서적들 (출처 : 경향DB)


300명의 아이들을 차디찬 바닷속에 빠져 죽게 만들고서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내 아이도 수학여행을 갔다가 저렇게 될 수가 있겠구나. 저 아이들이 바로 나의 아이들이구나.” 처음 느낀 감정은 분노였다. 먼저 배를 빠져 나오는 선장을 보면서 치를 떨었고 그 선장이 소속하고 있던 회사의 태만과 탈법을 욕했다. 그러나 그 내막을 알게 되면 알수록 더 이상 분노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 애비들이 만들어온 관행과 제도요, 그 모습은 곧 우리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들아, 그 선장은 바로 나였다. 분노는 순식간에 부끄러움으로 회한으로 바뀌었다. “뭘하고 살았는가?”

문제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이 애비는 은근히 아이들이 나약하고 물정 모르고 자기만 알고 게다가 버릇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이 완강한 사회에서, 탈출할 수 없는 배에서, 어둠 속에 잠겨가는 절망스러운 철감옥 속에서도 “엄마, 사랑해요” “친구야,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용서해다오” 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우리가 가르친 것은 이기심과 경쟁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우리 어른들이었다.

아들아, 정의다. 우리가 상실한 것이, 우리가 경제를 위해 팔아버린 것이, 그래서 우리가 이렇듯 비천한 존재가 된 것이. 아들아, 정의다. 아직도 울부짖는 희생자들의 가족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이, 이 난파된 배에 방향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이, 그리고 이제 너에게 물려주고 싶은 가장 소중한 것이, 정의다.


이건용 | 작곡가·서울시오페라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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