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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편입 딸

opinionX 2018. 5. 18. 17:38

올해 개봉한 유지영 감독의 독립영화 <수성못>. 이 영화는 서울공화국 아래 지방에서 살아가는 ‘편입 딸’의 곤궁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20대 초반 딸은 대구에서 유원지로 유명한 수성못에서 알바를 하며 서울 소재 대학에 편입 준비를 하고 있다. 대구에는 청년이 할 만한 일이 없어 뭐라도 선택할 수 있는 서울에 가고 싶다.

엄마는 딸이 멀쩡히 잘 다니던 지방대를 때려치우고 되지도 않는 서울타령을 하고 있어 속이 잔뜩 상해 있다. 이왕 공부하려면 공무원 준비나 할 것이지, 철딱서니 없는 딸은 허파에 바람이 들어 서울로 내뺄 생각만 한다. 뭐라고 하고 싶지만 80만원 받으며 고달프게 일하는 딸이 안타까워 차마 입도 못 뗀다. 먹고사느라 ‘근로’하기 바빠 딸을 관리경영하기는커녕 변변히 돌봐주지도 못해 이 지경에 이른 것 같아 미안하다.

딸은 사실 알바 대신 편입 공부에만 몰두하고 싶다. 집에 손을 벌려야 하는데, 차마 못한다. 평생 가족밖에 모르고 ‘성실하게’ 살았음에도 자신을 뒷받침할 능력이 안되는 부모가 측은해서다. 이대로 지방에서 살아가다가는 부모 꼴 난다. 어서 집을 떠나 서울로 가자. 우선 편입 시험에 붙어야 한다. 알바하는 틈틈이 짬을 내 ‘딸딸딸’ 영어 단어를 외우지만 꾸벅꾸벅 졸기 일쑤다. ‘적당히 치열하게’ 공부하기에 실패할 것이 뻔해 보인다.

식탁에 둘러앉은 딸과 엄마는 여간해서 대화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를 연민한다. 이 연민의 공동체는 곪아터지기 직전의 종기처럼 잔뜩 부풀어 올라 척 봐도 위태위태하다. 뾰족한 말 한마디만 주고받아도 서로 깊은 내상을 입는다.

어느 날 집에 들어왔다 자기 방을 치우고 있는 엄마를 발견한 딸. 왜 허락도 없이 남의 방에 들어와 개인 물품을 함부로 만지냐며 소리소리 지른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 딸이 못마땅했던 엄마.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니가 지금 하는 게 우리 집 형편에 맞나, 엉? 남들은 졸업해가 다들 취직하는데, 뭔데 그래, 다 늦게 학교 간다고 이 난리고?”

‘나만의 방’을 침범당해 잔뜩 화가 난 딸은 뜬금없는 편입 얘기에 켜켜이 쌓인 불만을 토해낸다.

“내가 엄마한테 뭐 도와달라고 그랬나? 뭐 해준 것도 없으면서 왜 참견인데?”

자신도 내팽개치고 가족 돌봄 노동에만 매달려온 엄마는 기가 차다.

“와, 니는 부모가 해준 것도 없으면 부모노릇도 하지 마라 이건가? 오냐, 그래. 니는 돈 없는 부모가 우습다 이거지? 엉? 천박한 년!”

“뭐? 천박? 와, 어이없다, 씨.”

엄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욕질을 해대는 지방사회. 엄마가 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물어뜯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어디서 맨날 공부타령이야, 이 미친년이. 집이 하숙집인 줄 아나? 나가!”

딸도 지지 않고 맞받아친다.

“없는 집구석에 태어나서 쌔빠지게 일하면서 공부해도 고생한다는 말 한마디 안 하는 주제에 부모는 무슨 부모. 있으라케도 나간다, 알겠나?”

딸은 집 밖으로 뛰쳐나간다. 어디 갈 데는 있는가? 영화는 서울에 편입 시험 보러 간 딸이 지하철역에서 낯선 남자에게 뺨 맞고 지갑 뺏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방 청년이 서울로 올라가 ‘특별’시민에게 갑질당하는 현장을 은유적으로 그린 셈이다.

‘탈지방민’은 설사 서울 편입에 가까스로 성공한다 해도 우선 주거비와 생활비, 등록금에 허리가 휜다. 게다가 지방대 출신이라고 온갖 차별과 멸시를 받는다.

현재 지방자치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지방자치는 단순히 중앙 자원을 지방에 분산시키는 행정 절차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에토스다. ‘편입 딸의 적당주의’와 ‘공무원 엄마의 성실주의’가 뒤범벅된 연민의 공동체가 지방의 에토스를 지배하는 한, 결단코 희망이 없다. 연민을 후벼 파면 바로 증오가 폭발할까 두려워 서로 말도 제대로 못 붙이는 처참한 현실. 영화는 섣불리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우선 고발한다. 침묵의 카르텔이 똬리를 튼 사이 쾌적한 유원지 수성못이 아래로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다고.

<최종렬 계명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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