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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이후 정치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상은 보수다. 부패와 무능으로 점철된 보수의 밑바닥이 그대로 드러난 지난겨울의 영향 때문이다. 그들은 농익은 고름들을 모두 짜내고 ‘보수의 새살’을 돋게 할 수 있을까.

탄핵 대선이 지나고 두 달, 보수정치의 현주소는 ‘지리멸렬’과 ‘경쟁’ 두 단어로 집약된다. ‘합계 127석’의 두 보수정당이 한 자릿수 지지율을 전전하며 도토리 키재기를 하는 현실은 탄핵의 겨울만큼이나 암울하다.

그나마 ‘경쟁’이 시작된 것은 흥미롭다. ‘보수 교체’를 이야기하고 ‘새 보수’ 구호가 등장했다. 그것도 가치 경쟁을 하겠다고 한다. “보수는 노선투쟁할 만큼의 이념도 없다”는 야당 의원의 자조처럼 소신보다는 ‘편안한 울타리’를 택하던 보수정치의 무리근성을 생각하면 놀랄 일이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와 정우택 원내대표가 6일 국회 도서관에서 열린 국회의원-당협위원장 연석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새누리당(자유한국당 전신)은 어땠어.” 

“새누리당? 거긴 구려.”

2014년 지방선거 당시 피곤한 몸을 구겨 넣은 심야버스 앞자리 20대 남녀의 대화다. 전날 서울시장 후보자 토론을 두고서였다. ‘구리다’는 것, ‘스타일, 생각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싫다’는 감정적 배제의 언어였다.

정치 좀 안다는 지인에게 물었다. “보수의 가치는 뭘까?” “책임, 원칙, 애국…. 뭐 그런 거?” 마지막 말은 “그 양아치들은 왜?”였다.

세상의 부모들이 모두 보수일 리 없듯, 자식들이 모두 진보일 수도 없다. 지금 한국사회의 단면인 이념적 세대갈등은 그래서 허상이다. 세대 간 소통이 욕망의 벽에 막히고 단절된 결과일 뿐이다.

한국에서 보수는 개인적 욕망을 우선하는 보수였다. 보편적 국가들에서 보수의 덕목인 “희생과 헌신”(박세일 <지도자의 길>)은 한국 보수에선 자리잡지 못했다. 보수는 스스로를 ‘보수’라 말하지도 않는다. ‘애국세력’이니 ‘산업화 세력’이니 돌려 말한다.

개인 욕망을 우선했기에, 한국 보수는 사회성도 획득할 수 없었다. ‘성공’한 보수들 눈에 자식들은 모두 앞가림 못하는 ‘못난 자식’들이다. 과거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훈장처럼 추억하던 그들은 이제 “북한 가서 살아봐라”는 훈계를 늘어놓기 일쑤다. 그런 자식들에게 앞세대는 구릴 뿐이다. ‘구리다’는 젊은 세대의 감정 속에서 ‘보수=꼰대’라는 파생 등식도 생겨난다. 그나마 ‘룰’을 지키는 보수와 룰 위에 군림하듯 ‘행세’하는 보수로 나뉜다. 후자는 수구·극우 등으로 조롱받는다. 그들이 바로 ‘보수의 고름’들이다.

문제는 ‘보수의 고름’들이 보수경쟁에서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점이다. 보수정치 재생의 출발점은 그들이 시대착오적으로 휘둘러온 이념의 칼을 향한 태도일 것이다. 그 점에서 새살은커녕 상처가 더 문드러질 판이라 절망적이다.

107석 제1 보수정당인 자유한국당의 선택은 홍준표였다. 막말과 기행으로 비웃음의 ‘아이콘’이 돼버린 그다. ‘즐풍목우(櫛風沐雨)’ 각오로 보수를 “혁신”한다고 하지만, 전대 내내 외친 것은 “주사파 패당정부” “보수우파 결집”이었다. ‘친박’의 몰락으로 무주공산이 된 수구를 ‘친홍’으로 바꿔치겠다는 욕망이다. ‘모래시계 검사’의 패기는 간데없이 탄핵 광장에서 난동하던 태극기 보수에게 정치적 명운을 구걸하는 초라함만 남았다.

정략적 이념논쟁은 국민들을 불신의 감옥에 가둔다. 그래서 몹시 반공동체적이다. 낡은 보수정치는 시대 변화에도 불구하고 과거 성공의 추억에 취해 스스로를 ‘이념의 감옥’에 얽어매두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게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

그나마 바른정당에서 희망의 어린 싹을 본다. 바른정당의 선택은 “낡은 보수가 해온 종북몰이,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것과 결연히 차별화하고 공정한 경제개혁을 하겠다”며 ‘새 보수’를 선언한 이혜훈이다. 그가 친유승민의 상징적 인사고, 새 보수가 당초 ‘박근혜 정치’에 저항한 유승민의 브랜드임을 감안하면 바른정당의 선택은 의미심장하다.

보수는 건강해져야 하고, 그래서 살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라는 권력의 견제자로서, 국가의 한 축을 이뤄야 할 의무가 있다. 문제는 정당성과 명분에서 최소 대등한 정도라도 위상을 확보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일 게다. ‘쪽수 보수경쟁’이 아닌 ‘가치 보수경쟁’이 필연적인 이유다. 퇴행한 한국당 경선 결과가 증명하는 바다.

<모차르트>의 저자인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모든 위대한 사람들은 ‘과도기’에 출현한다”고 했다. “항상 몰락하는 구계급과 부상하는 신흥계급의 규범 사이에 전개되는 역동적 갈등에서 나온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였다. 누가 구계급이고, 누가 신흥계급인지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벼랑 앞에 선 보수정치 입장에서 봐도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김광호 정치·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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