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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는 힘이 세다. 그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는 정치권력은 드물다. ‘경제 민심’은 불씨만 대면 화르르 타버리는 바싹 마른 장작처럼 성마르다.

 집권 2년차를 지나는 문재인 정부도 ‘시련’을 피해가진 못하고 있다. 고공 지지율을 앞세워 거칠 것 없던 정부는 경제 성적표 앞에서 초라해보일 정도로 왜소하다. 정권의 분수령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만큼 깊은 위기다.

지금 위기의 미묘함은 정치적 논쟁 대상으로서 ‘지지층 정치’의 문제가 그 가운데 놓여 있다는 점이다. 직접적으론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노동이 고용에 미친 영향이 쟁점이다. 수개월째 내리막이던 고용의 산술적 수치는 두달 연속 ‘재난’에 가깝다. 최저임금 인상이 문재인 정부 공약이고 진보진영 의제라는 점에서 정치적 논쟁이 과학적 검증을 대신하는 양상이다. 야당 등 반대 진영은 ‘최저임금의 저주’를 단정한 채 소득주도성장 패러다임을 무너트리려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과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금융감독원 연수원에서 두 번째 정례회동을 하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지층’이란 특정 정권을 통해 무언가를 구현하고자 하는 이들을 총칭한다 할 수 있다. ‘묻지마 지지’를 속성으로 하는 ‘팬덤’과는 구분된다. 시민의 정치참여에서 보면 정권은 이처럼 목적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도구일 수 있다.

 “지난해 (최저임금이) 16.4% 오른 것은 생각보다 높았다. 솔직히 저도 깜짝 놀랐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의 지난 3일 언론 인터뷰 발언이다.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은 도대체 누가 결정한 것인가.

 정권은 ‘공약’의 관성에 안주하고, 그 정권을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지지층은 그들 의제에 ‘과속’ 성향을 보이기 마련이다. 특히 5년 단임이란 마감시간을 생각하면 정권과 지지층의 마음은 급해진다. 이 경우 정교한 전략과 세심한 추진은 실종되기 쉽다. 최저임금 인상 과정은 당장의 원전건설 중단은 관철하지 못해도 ‘원전 없는 세상’을 못박는 계기가 된 ‘탈원전’ 정리 방식과는 달랐다.

 실상 역사의 시간 동안 숱한 ‘개혁’ 좌절은 조급함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선 전기 대유학자 이황과 기대승은 서신에서 조광조의 개혁 실패를 두고 “현자들이 위태로울 때를 맞아 경계하지 않고 너무 날카롭게 앞으로만 나아갔다”고 탄식했다.

 조급함은 ‘권력의 획득’을 ‘권위의 획득’과 동일시하는 자만과 만날 때 커진다. 이는 그간 진영들의 대결 정치에선 당연시해온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권력 획득이 결코 권위의 획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권위의 획득은 ‘권력 행사가 정당할 때’라는 요건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정당성을 구성하는 요소는 몇가지다. 성과도 권력의 민주적 행사를 의미하는 설득·소통 등과 함께 그중 하나다.

 지지층 정치는 실상 진영 정치의 덫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양날의 칼이다. 반대편 경쟁자들에게도 가장 손쉬운 대응수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반대’ 깃발만 들면 그들 역시 쉽게 정치적 동력을 얻는다. 무조건에 가까운 반대를 통해 정권의 의제를 좌초시키는 것이 우선 목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정은 지지층의 바퀴만으론 매끄럽게 굴릴 수 없다. 집권 초 손쉽게 지지층 동원에 나섰던 정권들은 ‘진실의 순간’에 마주하게 된다. 문재인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경제위기라는 난기류를 맞딱뜨려 ‘다른 길’도 기웃거릴 때 이는 지지층과의 불화·균열로 이어지게 된다. “너무 초조하다. 진보진영의 개혁 조급증·경직성 때문에 오히려 실패할 수도 있다”(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고 통증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지지층은 이를 정권의 변심으로 읽는다. 초반 ‘개혁 속도전’으로 정국을 장악할 때 사려깊은 전략에 대한 공유가 없었기에, 그들은 동원 대상으로만 취급받았을 뿐이라고 느낀다.

 진보 지지층이 이해할 것은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이 정권 역시 ‘5년’이 한계라는 점이다. 혁명적 변화를 제도화하길 바라지만, 그 방법은 설득·타협의 더딘 시간이 흐르는 민주적 ‘개혁’일 수밖에 없다. 5년짜리 정권이 감당할 수 있는 건 변혁의 씨앗을 뿌리고 이어갈 힘을 만드는 정도다. 이 때문에 ‘디테일’이 중요해진다. 모든 성공한 혁명은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꾼” 사람이면서, “리얼리스트가 되자”(체 게바라)고 했던 이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지지층 정치’를 끌어가야 할 정권의 책무는 더 무겁다. 그들은 언제든 동원 가능한 팬덤과 달리 지지와 성찰·비판이 모두 가능한 정치적 시민이기 때문이다.

 지지층 정치의 ‘진실의 시간’에 마주한 정권이 밟을 수 있는 길은 3가지다. 더욱 지지층만 붙들고 가는 길이 하나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걸은 경로다. 두번째는 지지층과 불화를 감수하고 ‘국정의 명분’으로 정면돌파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대연정 같은 식 해법이 단적이다.

 마지막 길은 가장 어렵다. 비전과 전략으로 정권의 방향에 대한 확신을 지지층에 설득하면서 국정과의 거리를 좁히는 길이다. 최저임금 무책임에서 보듯 지지층의 과속 성향을 정치 동력으로만 삼으려 해선 안된다. 지지층의 실망감은 그래서다. 지지층은 설명하고 동의를 구할 첫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지층의 이해와 조금이라도 결을 달리할 땐 더더욱 그렇다.

<김광호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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