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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31일 오후 11시(현지시간) ‘드디어’ 유럽연합(EU)을 탈퇴한다. 2016년 6월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에서 EU 탈퇴를 결정한 지 3년7개월 만이다. 2015년 5월 총선에서 과반을 얻은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보수층 일각의 EU 탈퇴 주장을 정리하겠다며 공약한 국민투표의 결과가 EU 탈퇴로 나타나면서 혼란은 시작됐다. 보수당과 정치권은 ‘이러려고 국민투표한 것이 아닌데’라고 당혹해했지만 화살은 이미 떠났다. 민심을 읽지 못한 오만과 오판이었고, ‘무모한 도박’이었다. 영국 내부도, EU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극심한 혼돈에 빠졌지만 더 헤맨 것은 의회였다. 현대 의회민주주의의 효시라던 영국 정치는 보수당과 노동당이 극한으로 대립했지만 무기력의 끝을 보여줬다. 총리가 두 번 바뀌고, 조기총선을 두 번 치르고서야 EU 탈퇴의 문을 열게 됐다.

영국의 유럽의회 의원인 로리 팔머(오른쪽)와 주드 커톤달링이 29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 유럽의회에서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협정안 비준 투표가 끝난 후 아쉬운 표정으로 서 있다. 브뤼셀 _ AFP연합뉴스

지금 총리인 보리스 존슨이 강경한 브렉시트론자이지만 EU 탈퇴의 불쏘시개가 된 것은 영국독립당 대표 나이절 패라지였다. 패라지는 이민이나 외국인에 대한 반감을 부각시키면서도 친나치적 입장과 폭력적 급진성에는 선을 그었다. 이른바 ‘절도 있는 선택지’를 내밀었다. 그의 지지층은 중·북부 공업지대의 백인 저학력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원래 노동당 지지층이었다. ‘신노동당’이라는 개혁 프로그램으로 온건중도 흡수를 시도하는 노동당과, 이들에 대해선 애초에 관심 없는 보수당의 틈바구니에서 ‘내버려진 사람들’이었다. 패라지는 정치시스템, 기성정당에 대한 이들의 불신을 자극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유럽에서 포퓰리즘 정당이 성공하는 일반적인 패턴이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된 것도 비슷한 흐름이다.

한국도 4년이 흘러 총선의 계절에 접어들었다. 보수정당 통합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안철수 신당’을 비롯한 다자 구도 현실화 등 제도와 정치지형이 4년 전과 비교할 때 달라졌다. 이번 총선이 어떻게 굴러갈지, 어떤 결과로 마무리될지를 예상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4·15 총선까지 70여일 남았다. 문재인 정부 중반기에 치러지는 선거이니, 기본적 성격 규정은 현 정부에 대한 평가가 될 것이다. 박근혜 탄핵과 촛불민심을 등에 업고 들어선 문재인 정부인데 도대체 무엇을 했나(하고 있나),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만들어졌나(만들어지고 있나)…. 부동산 문제, 조국사태와 검찰개혁 등 세부 이슈들이 ‘정권심판론’과 ‘국정안정론’에 대한 유권자들의 판단을 가늠할 포인트로 거론된다.

정당들은 프레임을 어떻게 설정할지가 총선 결과의 성패를 좌우할 변수로 본다. 상대를 깎아내려 반사이익을 취하고, 지지층을 결속시키는 데 익숙하다. 이미지 포장에 주력하는 것도 특징이다. 현역 의원 물갈이 비율을 높여 ‘공천 혁신’을 했노라 주장하고, 새 인물은 내부 육성보다 외부 수혈로 충당했다. 감동적 스토리를 내세운 ‘참신하고 깨끗한’ 인재를 영입한 효과는 반짝하고, 오히려 역풍을 맞기도 한다. 더불어민주당 ‘영입인재 2호’로 입당했다 데이트폭력 논란으로 불출마를 선언하고 30일 탈당한 원종건씨 사례가 그렇다. 정당마다 주요 공약을 제시하지만 경제·사회적 불평등 완화와 사회안전망 구축, 기후변화 대응 등을 둘러싼 정책 경쟁이 선거판을 뒤흔든 적은 없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처음 적용한 이번 총선 결과를 주목한다. 여러 색깔의 정당이 원내에 진입해 ‘대안 경쟁’을 한다면 정치판에 새로운 활력이 될 수 있다. 원내 의석이 적더라도 거대 정당들을 자극시켜 민심에 귀 기울이고 변화와 쇄신의 동기부여를 하는 긍정적 효과를 기대한다. 민주주의라는 게 다양한 의견이 분출하다보면 시끌벅적해진다. 활기찬 파티의 현장이랄까. 변화를 거부하고 이분법적 편가르기를 조장하는 정당은 어디서 술을 잔뜩 마시고 와서 난동 부리는 취객으로 취급받아야 한다. 영국 노동당이 지난달 총선에서 84년 만의 기록적인 참패를 했던 것처럼 말이다.

현실정치를 쳐다보고 있으면 회의감이 커지기 쉽다. 정당정치에 대한 실망, 분노, 혐오로 연결된다. 정치적 무관심은 기득권 정치를 공고화한다. 분명한 것은 사회를 바꾸는 것은 정치고, 정치를 바꾸는 것은 선거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시민들의 생각이 모아지면 강한 힘이 생겨난다. 실제 한국 정치의 고비마다 시민들이 표심으로 정치의 변화를 견인했다.

<안홍욱 정치·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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