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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우는 ‘도시이민 1.5세대’라 할 수 있겠다. 농촌에서 태어나 도시에 일터를 잡은 부모님들은 ‘이민 첫 세대’다. 한 번도 제대로 농촌의 삶을 산 적은 없다. 도시에서 태어났고, 고교까지 학창 시절도 그곳에서 보냈다. 서울에선 모두 “시골” 취급받는 대구지만. 그럼에도 ‘2세대’가 아닌 것은 ‘기억 유전자’ 한쪽에 또렷한 그곳의 감각들 때문이다.

부모님을 따라 봄이면 감자를 캐고 모를 심고, 가을이면 나락을 베고 털던 기억들. 그럴 때면 온몸은 흙투성이가 되거나 나락 쭉정이로 까끌까끌했다. 닭을 잡겠다고 키를 나무막대기로 받쳐놓고 눈이 빠져라 기다리기도 했다. 상점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시골본가가 ‘구판장’을 할 차례라도 되면 과자 먹을 생각에 갈 날을 꼽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그런 감성이 ‘1도’ 없는 우리 아이들은 세대를 건너뛰어 바로 ‘이민 3세대’가 될 것이다. 이쯤되면 이민의 의미는 없다. 그냥 도시사람이다. 이처럼 세대마다 급변하는 ‘도농 유전형’은 산업화 시기 격렬했던 ‘노마드적 농촌’의 현실과 무관치 않다.

그렇다고 시골뜨기는 아니었다. 아스팔트와 사각형 시멘트 건물들이 더 편안했고, 2층 양옥과 아파트로 변하는 도시적 유행에 더 반응했다. 실상 농촌은 관심 영역 밖이었다. 더구나 농촌 정체성의 본질인 ‘흙’이 재미난 이야기가 되리라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최근 읽은 일본 토양학자 후지이 가즈미치의 <수수하지만 위대한 흙 이야기>처럼 흙은 너무 수수해서 ‘홀림’의 대상일 수 없다. 그 책이 마음에 스며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발밑에 있는 흙보다 천체 움직임에 관해 더 잘 알고 있다.” 후지이의 책에서 특히 주목한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 말이다. ‘위대한 것은 평범하다’고도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숨은 위대함’보단 ‘보이는 평범함’에 영향받는다.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도 평범함의 베일에 덮이고 나면 동경하지 않는다. 그게 매혹의 법칙이다. 우리는 스티브 잡스를 무척 동경하지만, “애플이 성공한 이유는 기술만 아니라 인문학이 기반을 이뤘기 때문”이라는 그의 이 말은 주목하지 않는다.

느닷없이 ‘흙’ 이야기를 꺼낸 것은 수수한 흙이 마음에 닿은 이유도 있지만, 어떤 근심 때문이다. 현기증 나는 변화들 속에서 갈수록 ‘무능’해지는 듯한 두려움이다.

우리 사회는 ‘시대에 발맞춰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사회다. 낙오에 대한 강박적 공포가 있다. 늘 ‘금’ 안에 있으려 필사적이다. ‘루저’라는 자조적 말이 세대를 넘어 공감을 얻은 것도 그런 이유다. ‘변화=성장’을 당연한 지상가치로 여기는 발전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풍경이다. 이는 변화의 초입엔 저항감과 거부감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었다.

인간과 기술의 관계가 그렇다. 4차산업혁명이 운위되고,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패한 충격 이후 그 상황은 절정이다. 우리 눈은 ‘기술의 미래’에만 가 있다. 낙오되어선 안된다는 강박 때문이든, 매혹 때문이든 그렇다. ‘이(기술의 미래) 주제에 대한 출간물은 디지털 업계 선두주자가 형상화한 미래 상황을 제시하면서 구글의 자율주행 자동차, 질병도 진단하는 IBM의 왓슨 같은 이슈에만 주목하고 있다’(유럽노총연구소 보고서).

반면 기술의 주인인 ‘인간’은 방치돼 있다. 자율주행차든 왓슨이든 기술 속 인간의 운명은 깊이 고민되지 않는다. “우수한 1인이 일의 성과를 몰아받고 나머지는 기계가 대체하고, 기계보다 비용이 낮은 저임금 노동자만 남게 될” 세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도, 문제제기를 하지도 않는다. 일단 ‘나’만 이 두려운 변화에 발맞추면 되기 때문인 것일까.

흔히 4차산업혁명을 ‘디지털 자본주의(Digital Capitalism)’라고도 한다. 자본주의의 새 단계를 의미한다. 동시에 지금 기술 변화를 움직이는 본질이 자본임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거리를 찾는 ‘배민’ 라이더들의 시장(공급 시장)과 배달 서비스를 누리려는 시장(수요 시장)을 하나로 연결한 소위 플랫폼의 본질은 끊임없이 시장을 찾는 자본의 욕망이다. 기술은 그저 ‘거들 뿐’이다.

하지만 기술이 자본에 포획되기만 한다면 그건 끔찍한 악몽이 될 것이다. 바로 또 다른 ‘DC’, 즉 인간의 ‘죽음의 경쟁(Death Competition)’이다. 자본주의 역사가 ‘알파고’만큼의 정확도로 예언할 수 있는 일이다. 지난 세기 초에는 그래도 ‘반독점법’ 같은 장치라도 있었다. 지금 기술 자본주의엔 고삐조차 없다. ‘기술 자본’은 그들의 속도를 법과 정책이 절대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비웃는다.

후지이의 목표는 ‘지구인 100억명’을 먹여살릴 흙을 찾는 것이다. 그는 이를 ‘맛있는 궁리’라고 했다. 기술의 시대, 우리의 궁리는 무엇이어야 할까. 그건 함께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을 찾는 것이 아닐까.

<김광호 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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