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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척이던 새벽잠, 그의 목소리가 들려 번쩍 눈이 떠졌다. 2015년 4월9일 아침 북한산을 오르며 48분간 마지막 인터뷰를 했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었다. 홍준표 경남지사가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다음날이다. 밖은 아직도 어두웠다. 5시56분. 스마트폰에는 20분 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됐다는 긴급뉴스가 떠 있었다.

홍 지사의 항소심 재판장은 다섯 달 전 이완구 전 총리에게도 무죄를 선고한 판사였다. 두 사람의 1·2심 판결문 4개를 밑줄 그으며 읽고 또 읽었다. 판사로부터, 나 스스로부터 생길 수 있는 선입견을 줄이는 데까지 줄이고 싶었다. 남은 것은 유감스럽게도 온갖 물음표였다. 홍 지사의 무죄 판결문은 시작과 끝이 급반전했다. 재판부는 ‘금품 전달자 윤승모가 성완종에게 1억원을 받아 홍준표에게 전달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신빙성 있는 게 사실’이라고 전제했다. 이완구 재판 때 배제한 성완종 녹취록은 다시 증거로 채택했다. 홍 지사 쪽 사람들이 “홍 지사는 모르는 돈으로 해달라”고 윤씨에게 노골적으로 ‘거짓 증언’을 회유한 전화 녹음파일도 증거로 인정했다. 그럼에도 끝에는 ‘윤승모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려운 사정이 있고 검찰 증거도 미흡했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국회 의원회관이 공사 중인 걸 왜 기억하지 못했는지, 띠지를 고무줄로 바꾼 곳이 집 거실인지 안방인지, 여의도로 가는 차에서 부인은 옆에 앉았는지 뒤에 앉았는지…. 판결문에는 검찰이나 법정에서 바뀌거나 헷갈린 윤씨의 진술이 여럿 적시됐다. 1심에선 설암 투병 중에 4년 전 상황이 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해 참작된 부분이다. 사실관계를 다툴 여백을 인정하면서도 항소심은 방어권을 더 톺아봤다. 처벌을 자처한 금품 전달자의 말은 배척되고, 끝까지 돈의 행방은 모른 채 끝낸 재판이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16일 열린 성완종 게이트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을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왜 홍준표를 메모와 인터뷰에 담았을까. 내내 곱씹어본 물음이다. 8명의 리스트에서 홍 지사는 친박도 아니고, 박근혜 대통령과의 거리도 가장 멀었다. 그 답은 성 전 회장이 죽기 사흘 전 윤씨의 병실을 찾아 사실대로 말할 의지가 있는지 확인한 데서 열린다. “녹취록과 메모에 대한 신뢰도, 검찰 수사도 여기서부터 풀리길 바랐던 거지요.” 성 전 회장의 아들과 측근이 돌아보는 말이다.

2015년 12월31일자 경향신문 1면엔 성 전 회장이 ‘올해의 인물’로 기록됐다. 기사는 “여전히 부정부패와 검은돈 뉴스가 이어지고, 살아있는 권력은 단죄하지 못한 2015년이었다”고 맺었다. 소름 돋게 맞는 얘기였다. 박 대통령이 “정유라 지원이 왜 안되느냐”고 삼성을 재차 닦달한 것은 성 전 회장이 죽고 3개월이 지난 뒤였다. 재벌들의 손목을 비틀어 미르재단이 출범한 것은 그해 10월이다. “이런 기업인은 나 하나로 끝나야 한다”는 성완종의 외침이 권력의 심부에선 희화화되고, ‘거악들의 모의’는 계속된 것이다. 입시 특혜를 준 대학 총장, 블랙리스트를 지휘한 비서실장, 삼성 79년사에서 처음 구속된 총수, 진시황의 생부였던 거상 여불위처럼 “세상에서 가장 큰 장사는 권력을 얻는 것”임을 보여준 최순실까지…. 여기저기 꼭짓점을 따고 대통령을 겨누는 특검을 보며 속에 맺히는 게 있다. ‘성완종 특검’이 떴다면 이리 엉성하고 기울어진 정경유착 수사가 됐을까. 낯부끄러운 ‘8 대 0’ 성적표를 받아든 검찰은 명예회복의 마지막 벼랑에 섰다.

‘만사구비지흠동풍(萬事俱備只欠東風).’ 홍 지사가 승소 후 페이스북에 올린 삼국지의 고사다. 적벽대전을 앞둔 제갈량이 주유에게 ‘모든 조건이 갖춰졌고 가장 중요한 동풍만 남았다’고 한 말이다. 그 동풍에 무죄 판결을 빗대고픈 속마음을 실은 셈이다. ‘천하대란에는 크게 통치해야 한다’→‘박근혜의 위기이지 보수의 위기가 아니다’→‘큰 선거를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다’. 페이스북에선 대선을 곁눈질하는 ‘일일준표’ 정치가 다시 시작됐다. 무상급식과 평생 싸우고 진주의료원 폐쇄를 밀어붙인 그는 ‘서민복지’와 ‘핵무장론’을 앞세워 보수의 정치에너지를 쌓고 있다고 생각할 터다. 하나, 그가 넘어야 할 대선의 심리적 벽은 성완종 녹취록이다. 그의 재판에는 묻혀 있는 의혹과 더 살펴야 할 팩트가 수두룩하다. 좌불안석이 돼 금품 전달자를 회유하려 한 녹음파일의 비밀은 깨끗이 풀려야 하고, 띠지가 고무줄로 바뀐 채 묘연해진 1억원의 행방도 궁금하다. 3심제로 가는 ‘법정게임’과 달리, 선거판은 2심의 ‘무죄 판결’과 세간에 걷히지 않은 ‘유죄 심증’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는 면죄부를 받았다고 하루하루 자기최면을 걸고 있을까. 그의 보폭이 커질수록 맹성과 자숙을 권하는 역풍도 커질 것이다. 개운치 않은 홍준표의 정치가 제갈량이 기다린 동풍을 만날까. 마이동풍이 될 수도 있는 봄이다.

이기수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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