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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시간에 교내 도서관에 갔는데, 어떤 아이가 혼자 앉아 책을 보고 있다. 요즘에도 이런 학생이 있나? 그의 책상 위에는 판타지 소설, 과학 잡지, 철학서들이 잔뜩 쌓여있다. 순간 궁금했다. 이 아이는 누구랑 어울릴까? 얼마 뒤 복도에서 그 아이가 내가 가르치는 현우(가명)와 얘기하는 것을 보았다. 안도감이 들었다. 현우는 수업이 끝나면 제일 먼저 교실 밖으로 나갔다가 시작종이 치면 교실로 돌아오는 아이였다. 아이들은 현우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가끔 현우에게 말을 거는 아이들도 있지만 대화를 더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잘 알지 못한다. 현우도 그들 사이에 어떻게 끼어들어야 할지, 어떻게 반응하고 말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쉬는 시간에 교실에 있는 것이 그에게는 힘든 일이다. 다행히 그 두 아이는 다름 안에서 함께 어울리고 밥도 먹는 친구가 됐으니 그들의 학교생활은 그나마 괜찮을 것이다. 

아이들은 아직 여리고 미숙하기 때문에 교우관계에 갈등이 생기고 따돌림을 겪게 되면, 그들의 심리와 감정, 반응 방식은 손상을 입고 움츠러든다. 이런 아이들에게 가장 큰 걱정은 점심시간이다. 급식실에서 친구 하나 없는 식탁에 혼자 앉아 밥을 먹는 것은 배고픔보다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기 때문이다. 담임교사가 짝을 지어주기도 하지만, 아이들 관계라는 게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아이들은 자신도 저렇게 혼자 남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작은 차이도 경계하고 멀리한다. 그래서 교실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는 친구 주변에 몰려들게 되고, 끊임없이 무리를 지으며 결속을 다진다. 이제 누군가 교실의 어떤 아이를 욕하면 같이 동조해야 하고, 듣기 거북한 성적 표현도 따라 하거나 함께 웃어야 한다. 교실은 이렇게 누구도 진정으로 홀로 되지 못하며, 동시에 누구도 함께 공존하지도 못하는 메마른 들판이 된다. 많은 학교폭력이 이 메마르고 척박한 그늘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또다시 이 모든 것이 누구의 책임인지 묻고 싶어진다. 학교는 가정교육과 대중매체가 문제라고 하고, 부모들은 학교와 교사의 책임이라고 한다. 그러면 다시 학교와 교사는 교육제도가 문제라고 하고, 정부는 사회 구성원들의 서로 다른 입장과 이해관계에 끼어서 정책 사이를 오락가락하다가 책임자 교체를 반복한다. 제도 자체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진정한 책임은 우리 자신도 제도의 일부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 모두가 제도와 문화를 만드는 데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는 데 있다. 

논어(論語)에 ‘평화로움을 추구하되 같아지려 하지는 않는다’란 뜻의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말이 있다. 동일성을 강조하다 보면 자신과 다른 것은 부정하고 배제하게 되기 때문에 갈등과 대립은 끊이지 않는다. 아까운 사회적 비용과 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무엇보다 사회 발전을 위한 다양한 상상력과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교실이 서로 다른 차이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화이부동’의 공간이 되려면 그런 모습을 현실에서 실제로 보여주는 어른들이 필요하다. 

4월의 새순들이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하늘거리고 있다. 아이들은 우리 사회의 봄과 같은 존재이다. 이 아이들이 구김 없이 마음껏 배우고 성장할 때 우리 모두의 가을은 달콤하고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다. 아이들이 커가는 교실을 비옥한 옥토로 만들어주기 위해 우리는 각자가 있는 공간에서 어떤 씨앗을 뿌리고 어떤 비료를 줄 수 있을까?

<조춘애 광명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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