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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87’이 지고 ‘97’이 뜬다는 칼럼을 한 신문에 쓴 적이 있습니다. 87은 민주화의 원초적 체험인 6월항쟁을 말하고, 97은 세계화의 원초적 체험인 IMF 외환위기를 말합니다. ‘87’이 민족이나 국가가 지향하는 ‘정상’이나 ‘중심’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 이들이 주도한 시대였다면, ‘97’은 오솔길일지언정 자기만 만족하면 그만인 사람들이 욕망을 한껏 발산한 시대였습니다. 삶의 방향성을 추구하던 사람들도 삶의 무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말을 바꿔 탔습니다.

제가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저는 2005년 말에 블록버스터 영화 <태풍>을 막내딸과 함께 보았습니다. 딸은 이 영화가 남북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는지를 알고 싶어 <태풍>을 본다고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까지의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는 <쉬리>(1999), <공동경비구역>(2000), <실미도>(2003), <태극기 휘날리며>(2004), <동막골>(2005) 등 모두 남북문제를 다룬 것뿐이었습니다.

영화를 본 딸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딸은 곧이어 개봉하는 <왕의 남자>를 빨리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딸의 말대로 <태풍>은 기대 이하의 성적표를 받아든 반면, 사실과 허구를 뒤섞어 현실의 중압감과 버릴 수 없는 꿈의 판타지를 호소력 있게 전달한 <왕의 남자>는 모든 세대에게 각기 다른 이유로 호응을 얻으며 전인미답의 관객을 맞이했습니다. 이걸 보고 저는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구나, 하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07’(2007년) 체제에 저는 ‘개중(個衆)화’란 문패를 달아주었습니다. ‘개중’이란 개인과 대중을 합한 말입니다. 대중은 세중(細衆)의 단계를 거쳐 개중이 되었습니다. 2006년 말 ‘타임’이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당신(You)’이 바로 개중이었습니다. 혼자 원룸에 살면서 휴대전화나 메신저로 타인과 대화를 나누고 블로그를 통해 자신을 발신하는 등 철저하게 ‘1인용’으로 생활하지만 외로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 개인 말입니다.

군중(crowd)과 아웃소싱을 합한 ‘크라우드소싱’이라는 신조어의 등장이 증명하듯이 지혜가 필요할 때는 대중에게 손을 내밀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2007년 ‘88만원 세대’라는 비극적인 신조어가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개인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세계화의 전도사인 토머스 L 프리드먼은 <세계는 평평하다>에서 지금 이 시대를 이끄는 역동적인 힘은 국가나 대기업이 아닌 개인과 소규모 기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기술의 발전, 통신기술의 혁명적 진화, 인터넷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지역이나 국가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개인이 더욱 강력한 힘을 갖추게 되면서 세계는 축소되고 평평해진다는 것이 프리드먼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터진 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는 개인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완전히 드러냈습니다. ‘개중화’가 성립하려면 개인을 살려낼 수 있는 인문학적 반성부터 필요했습니다. 개중화는 이전 체제인 ‘97’ 체제의 반성을 통해 총체적 모순을 극복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는 이명박 정권이라는 구체제, 즉 추악한 기득권 세력이 권력을 잡고 모든 일을 농단했습니다. 그로 인해 개중화로의 변신은 함몰되고 말았습니다. 박근혜 정권도 이명박 정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참사”로 일컬어지는 ‘세월호’ 여객선 침몰사고는 구악의 기득권 세력이 글로벌 위기라는 ‘예외상태’를 악용해 ‘97’ 이전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마지막 끝물까지 빨아먹으며 저지른 온갖 패악을 적나라하게 노출했습니다. 가진 자들의 온갖 불법과 탈법, 이른바 ‘해피아’의 적폐, 국민과 소통할 줄 모르는 대통령의 제왕적인 통치 스타일, 받아쓰기만 할 줄 아는 국무위원과 청와대 비서들, ‘기레기(기자+쓰레기)’란 비난을 들어야 했던 언론, 생명보다 돈을 중시하는 사회 체제와 삶의 방식 등 상시적인 임계 상태에 이른 우리 사회의 민낯이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제2기 내각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것이라고는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된 조급함뿐이었습니다.

우리는 머지않아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17년’(2017년)을 맞이합니다. 우리는 그 체제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그 체제에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염원을 담아야 합니다. 인문학자 김경집은 <사회를 말하는 사회>(북바이북)에 ‘적법한 반칙을 깨뜨리자’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 글에서 그는 우리 사회는 “누구든 먼저 앞으로 달려가 선진 지식을 습득하고 다른 사람을 향도하여 빠르게 따라잡으면 성공할 수” 있었던 ‘패스트무빙(fast moving)’의 산업화 사회에서 벗어나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한 사람의 천재성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영감과 아이디어와 에너지가 결합되는 방식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공멸”하는 퍼스트무빙(first moving)의 21세기에 발 빠르게 적응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경집은 “인간의 가치와 주체성, 그리고 인격적 연대가 필수적”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저는 그 사회에 감히 ‘인간화’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1등만 잘사는 사회가 아니라 모두가 ‘중세의 촌락’에서처럼 훈훈한 마음을 드러내며 더불어 잘살고자 노력하는 사회를 반드시 만들어야만 합니. 그 세상을 맞이하려면 지금부터 이전의 세 체제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과 그에 따른 반성이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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