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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25일 페이스북에는 한 공중파 방송이 보도한 <‘지혜의 숲’을 걷다…책 권하는 진짜 도서관>이란 기사가 링크되어 있었다. 기사를 링크한 이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도서관은 ‘가짜란 말인가’라며 분개하고 있었다. ‘지혜의 숲’은 지난 6월19일 파주출판도시에 문을 연 공간이다. 만든 이들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와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창조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신개념의 도서관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도서관의 3대 구성 요소는 시설, 자료(책), 인력이다. 이미 존재하는 시설(건물)에 거대한 책장을 설치하고 책만 진열해놓으면 도서관인가? 자료는 데이터베이스화되어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혜의 숲’은 처음부터 데이터베이스화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8m 높이에 책을 진열해놓아 일부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지 않는 한 찾는 책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진열된 20만권의 책은 모두 기증된 책이다. 앞으로 100만권으로 규모를 늘린다지만 학자들이 기증한 것을 제외하고는 주로 파주출판도시에 입주한 출판사들의 책을 전시한 것에 불과하다. 이곳에는 호텔과 커피숍이 있다. 건물의 마감재를 책으로 장식한 호텔은 기념사진을 찍기에는 좋아 보인다. 한 출판인은 “실제 북카페에 가보면 책은 그냥 장식이고 누구도 펼쳐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냥 전시만 되어 있을 뿐”인 이 공간은 “한국에서 제일 큰 커피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책은 대출이 되지 않는다. 24시간 개방한다지만 밤에는 극히 일부 공간만 개방할 뿐이다.
24시간 개방한다 해도 밤에 그곳을 들르는 사람이 있기가 어렵다. 출판평론가 변정수는 “끼니를 거르면서도 명품으로 치장하는 이른바 ‘된장×’를 연상시키는 허세, 또는 이웃은 빈사상태에 허덕이는데 제 잇속만 챙겨 쌓은 알량한 여유를 부끄러움도 없이 자랑하는 다분히 졸부스러운 ‘돈지×’. 어느 쪽이든 속으로 골병들어 죽어가는 환자를 색동옷 입혀 보란 듯이 앉혀놓곤 하는 한국 출판의 황폐한 맨얼굴을 상징한다. 교통, 주거, 의료, 보육, 위락 등 기본적인 ‘도시기반시설’은 어느 하나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허허벌판에 건축전람회 도록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건물 몇 십동 지어놓고 ‘도시’라고 우기는 뻔뻔함은 <어린 왕자>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너희들은 아름답지만 텅 비어 있어”(‘기획회의’ 361호(2014·2·5)의 특집 ‘출판 생태계 사전’)라며 파주출판도시를 조롱한 바 있다.
그의 지적대로 이 도시는 밤에는 적막강산이다. 건물 내부도 많이 비어 있다. 최근에는 빈 공간에 북카페를 차려놓고 경쟁을 하는 바람에 입주자들끼리 의가 상해 다툰다는 소식마저 들린다. 출판사가 책의 질이 아닌 커피의 질로 경쟁한다는 것은 가히 토픽감이다. 태생부터 생활친화적인 도시가 아니었기에 출판사 종사자가 아닌 저자나 번역가 등은 그곳에 들르는 것마저 기피한다. 따라서 그곳에서 창의적인 상상력이 나오기가 어렵다.
‘지혜의 숲’은 사서가 아닌 ‘권독사’라 명명된 인력이 관리한다. 권독사는 차비와 점심값만 지급받는 자원봉사 수준의 임시직이다. ‘지혜의 숲’을 기획한 사람들은 인문사회과학서를 주로 펴내는 사람들이다. 그동안 인간이 살 만한 세상을 만들자는 내용이 담긴 책을 꾸준히 펴낸 것은 오로지 돈만 벌기 위함이었는가? 그들은 이제 양극화, 격차사회, 승자독식사회, 위험사회, 부품사회 등의 단어가 들어간 책을 펴낼 자격조차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백번 양보해 이런 시설 하나 존재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국비가 7억원이나 투입될 명분은 없다. 책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들에게서 ‘진짜 도서관’은커녕 ‘책무덤’이나 ‘책납골당’, 나아가 ‘종이무덤’에 불과하다는 비판까지 받는 공간에 말이다. 게다가 ‘경향신문’을 제외한 대부분 언론이 규모와 이미지에 놀라 격찬하는 바람에 5억원의 예산이 추가로 투입된다는 소식도 들린다.
지금 출판시장은 최악의 위기에 몰려 있다. 이럴 때에는 국가 예산은 출판이 근본적으로 가능성을 열어가는 데 도움이 되는 인프라에 투입되어야 한다. 가령 출판의 미래라고 여겨지는 전자책을 활성화하려면 디지털 공간에 맞는 서체가 다양하게 개발되어야 하고 디지털 저작권 관리(DRM) 시스템도 정비되어야 한다. 이런 일에는 그리 많은 예산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도 문화체육관광부는 예산이 없다며 지원을 거부했다. 그저 출판사들이 전자책 제작비를 신청하면 ‘닭모이’(혹은 새우깡) 주듯이 직접 지원하는 것으로 전자책 시장이 저절로 살아날 것처럼 행동해왔다. 그런 사람들이 ‘지혜의 숲’에는 없던 예산을 만들어 지원하려 든다. 국가 예산이 전시행정에 의해 집행되는 대표적인 사례라 아니할 수 없다.
변정수의 조롱은 이어진다. “한국 출판산업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이 랜드마크는, 작금의 출판 트렌드를 주도하는 책들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서가에 꽂아놓거나 들고 다니기에는 제법 멋져 보이지만, 정작 집중해서 읽기에는 사뭇 불편한, ‘독서용’이라기보다는 ‘장식용’에 가까운 ‘아름답지만 텅 비어’ 있는 그 책들”이라고 말이다. 이 도시에 더욱 자극적인 랜드마크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지혜의 숲’이라는 ‘종이무덤’ 말이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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