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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국가였던 그리스에는 현재 국내 멀티플렉스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야외공연장이 있었다. 그 공연장에서 매일 밤 수백편의 연극이 공연되었는데, 공연작품 대부분이 비극이었다. 처참하고 잔인한 야욕과 음모, 심지어 인륜을 거스르는 인면수심의 범죄 이야기까지를 그리스 시민들은 밤마다 비극이라는 언어와 공간으로 만났다. 그러한 공연의 문화는 도시국가 그리스를 지켜내는 거울 역할을 했다. 절대 일어나면 안 되는 인류의 타락과 무질서의 끝을 보여준 비극은 시민들의 자성을 불러일으키고 스스로의 시민의식을 깨우치게 하는 경험을 제공했다.

<사도> <동주> <박열> 등 몇 년 사이 시대극 세 편을 보여주고 있는 이준익 감독은 권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전했다. “후진국은 군인이, 중진국은 재벌이, 선진국은 문화가 권력을 갖는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보다 개혁적인 정책의 정당과 후보자들에게 후원금을 보내고, 전 세계가 비난하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할리우드 영화들이 가장 먼저 영화적 언어로 비판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문화는 권력의 한복판에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도 최근 수입 해외영화보다 항상 우위를 점하는 국내영화의 흥행성적을 만나게 되며, 그 영화들이 지금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택시운전사> <강철비> <1987> <1급기밀> 등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리얼리즘은 실제 리얼리티를 극복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기존 소설과 영화로 보여준 <도가니>의 문제의식은 실제 문제학교를 폐교시키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었고,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판도라>는 탈핵이라는 사회적 문제의식의 논의를 여론의 지표 위로 부상시킨 역할을 했다.

문화가 권력이 되면, 실제 그 권력을 감시하는 사회구성원의 역할이 더 중요하게 된다. 블랙리스트는 편향된 보수정권이 문화가 권력에 진입하는 사회적 성숙을 막아보려고 시도했던 유치한 정략이었다. 진보를 견제하고 건강한 대안을 제시하는 깨어있는 보수의 존재를 믿는다. 그러한 보수를 만드는 힘도 문화에 있다. 문화가 사회적 권력으로서 긍정적이고 기능적인 역할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은 더 많은 시행착오를 가져오고 더 복잡한 여론의 혼돈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문화는 오류를 수정하고, 오만을 보완하며, 대안으로서의 실천력을 자문한다. 그런 과정의 역할을 문화소비자가 해야 한다. 최근 국내영화 관람층의 잔잔한 변화가 인지되고 있다. 20대의 기존 영화소비 중심층이 40~50대로 전환되고, 그들의 여론이 이데올로기 중심의 극단적 패러다임을 상식과 현실에 기반을 둔 미래지향적 공유패러다임으로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문화정책 기조 중 중요한 한 가지가 문화예술인 복지이며, 실천방안으로는 프랑스 예술인 고용보험 ‘엥테르미탕(intermittent)’을 참고한 문화예술인 고용보험을 실시하고자 논의 중이다. 이러한 제도의 시행을 위해서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며, 그 과정에 문화예술인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실천이 함께해야 한다. 문화예술인 고용보험은 사회적 비용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지역사회의 문화바우처 제도와 함께 서민층의 소시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의 자원을 최대한 공유하도록 문화예술인들의 창의적 발상과 재능기부가 가득 넘쳐야 한다. 그러한 과정 또한 문화의 권력을 건강하게 하는 합의의 과정이다.

정치가 문화를 이용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문화가 그 정도로 정치에 이용될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화는 이제 여론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평가받으며 여론에 감시받고 있다. 그래서 문화는 소통의 공간이며, 그 공간의 언어는 대안의 논의를 상설화시켜야 한다. 그것이 비용과 시간의 낭비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내고 보면,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을 미리 예방하는 백신이라고 생각한다.

<세종대 교수 만화애니메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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