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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성과 정당성. 정당하지만 불법? 혹은 합법이지만 정당성 결여? 이게 가능한가? 대체로 우리는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정치적 행위자들, 그리고 국가기관의 경우는 합법성에 의해 정당성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합법성은 정당성의 근거가 아니다. 적어도 통치자들, 정치적인 권력자들, 엘리트들의 경우에는 말이다. 한국의 재벌들, 자본들을 보라. 그들이 합법성, 즉 법을 준수하고 법치주의자들이라서 정당성을 가지는가? 아니다. 그들의 정당성은 ‘법’에서 오지 않는다. 그들의 정당성은 현실 그 자체, 즉 그들이 ‘강자’이고 ‘가진 자’라는 현실에 의해 부여된다. 

예들은 수없이 있다. 기내에서 제공되는 땅콩이 마음에 안 든다고 비행기를 회항시킨 재벌 2세 사업가 사건, 매 한 대에 “얼마면 되겠니”를 외치며 사적 린치를 자행한 재벌 2세, 주차위반을 지적하는 주차요원의 뺨을 때리고 무릎 꿇린 백화점의 큰손 사모님. 또 최근의 노동 관련 ‘부당행위’는 어떻고? 현대차 불법파견의 정 회장. 부당노동행위의 백과사전을 펴낸 것 같은 유성기업 사례. 그리고 최근 갑을오토텍에서 공공연히 노조를 박살내라는 지령을 내리다 법정구속되고도 직장폐쇄로 맞대응하고 있는 박씨 형제.


유성기업 고공농성 (출처: 경향신문 DB)


그러나 합법성에 의해서만 정당성, 이 땅에서 살 권리를 가지거나 법의 보호를 받거나, 국민 혹은 주권자 혹은 유권자로 대접받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렇다. 합법성에 의해서만 정당성을 가지는 이들은 따로 있다. 소위 말하는 대중, 시민, 국민, 민중, 피압박대중 등등. 이 이름들로 시도 때도 없이, 때로는 거룩하게 때로는 비참하게 ‘호명당하는 자들’. 국가로부터, 자본으로부터, 체제로부터 호명당하는 자들. 하지만 이들을 ‘호명하는 주체’는 항상 따로 있다. 국민을 부르고 대중을 운운하고 시민으로 격상시켜주고, 또 서민들로 부르고 민중으로 으르지만, 언제나 그들은 국민 위에 있는 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호명하는 자들이다. 

곰곰이 상기해보라. 대통령이, 국회의원들이, 정당이, 법원이, 검찰이, 경찰이 그리고 심지어 언론들이, 식자들이 언제 자신들을 이런 이름으로 ‘호명’하던가? 호명하는 자들은 언제나 대중을 호명하면서 자신들은 ‘열외’로 만드는 분들이다. 그리고 호명당하는 국민들, 서민들, 민중들, 무산계급은 법을 지켜야만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는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죽음이다. 

하지만 호명하는 자들은 법을 지키지 않는다. 아니 법 이전의 정당성을 구가한다.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정치적 환경이 딱 그 모습이다. 탈법과 불법이 아니라 무법이고 초법이다. 아니 그들도 법 안의 존재인데, 그들은 불법, 탈법의 지대에 있지 않다. 말하자면 그들은 합법성을 통해서 정당성을 가지지 않는다. 거꾸로다. 정당성이 그들의 합법성, 아니 무법성을 만들어준다. 카를 슈미트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비합법적이지만 정당성을 갖춘 정치적 상태이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리자면, 무법의 지배가 만들어내는 권위다. 혼동하기 쉬운데 전체주의적 지배라고 해서 ‘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전체주의적 지배는 실정법의 상위에 있는 존재로 자신을 끊임없이 구현함으로써, 자신이 곧 ‘법 위의 법’임을 드러낸다. 

한국의 대통령은 국민이 질리도록 끝없이 ‘국민’을 호명한다. 세월호 참사 때도 호명하고, 노동개혁에서도 호명하고, 최근 사드 배치를 두고도 국민을 호명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사 끝이다. 혹자들은 그것이 “짐이 국가다”라는 말처럼 후지고 봉건적 언사 같다고 하지만, 스스로를 ‘짐’으로 호명하는 것과 타자들을 ‘국민’으로 호명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당신은 계속 호명당할 것인가? 그래서 당신이 선택한 자를 법 위의 존재로 세울 것인가? 아니면 주권자로 법 위에 설 것인가? 호명당하는 자가 호명하는 자를 소환하는 것이 바로 구체제의 붕괴였고, 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


권영숙 | 노동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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