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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사랑을 고백하고 떠났다. 그는 더 이상 사랑을 욕망하지 않는다. 남겨진 여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헤어진 순간 그녀의 사랑이 시작되었다면? 더군다나 그 사랑이 그녀의 전부라면? 한국에 밀입국하고 나이 많은 폭력적인 남편과 살아야 했던 중국여성 서래(탕웨이)의 밑바닥 인생은 철저히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편견 없이 대해 준 친절한 형사 해준(박해일)을 만나 사랑을 알아버렸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산에서 발생한 변사사건을 수사하게 된 해준이 사망자의 부인 서래를 의심하고 동시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되는 형사와 피의자 사이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린다. 해준이 헤어질 결심을 하고 떠나지만, 서래는 사랑할 결심을 하고 그가 사는 곳으로 이사를 간다. 공교롭게도 서래는 다시 피의자로 형사인 해준과 재회하고, 미제사건으로 남기 위해 비극적인 선택을 한다.

서래의 치명적인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떠난 사람을 놓지 못하는 그녀의 사랑을 그저 어리석은 집착이나, 기껏 남자 하나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는 지고지순한 여자의 사랑으로 규정해야 할까? 아니면 자신은 떠났어도 자신을 끝내 잊어 주지 않기를 바라는 남자의 판타지로 봐야 할까? 법과 도덕을 뛰어넘는 서래의 사랑은 분명 문제적이지만, 나는 사랑에 대한 그녀의 태도가 좋다. 매 맞는 외국인 여성, 타자 중의 타자인 그녀가 자신의 상처보다 해준의 상처에 아파하며, ‘무너지고 깨어질’ 것을 감수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실 서래는 헤어진 연인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가 상류사회를 대변하는 데이지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계급적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면, 서래의 사랑은 그런 이기적인 세속적 욕망과 거리가 멀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요구하지 않는 것도 개츠비와 다르다. 오히려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증거를 제시하며, 해준의 직업적 자부심을 회복시키려 한다. 상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그다운 모습으로 존재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헤어지자는 그를 존중하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그 결연함이,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는 그 뜨거움이 나는 좋다. 서래는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이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며 거침이 없다. 서래의 꼿꼿함은 세속적인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사랑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그녀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잔혹한 세상에서 사랑을 지키려는 주체적인 여성의 능동적인 서사는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마주치는 사랑의 모습은 어떠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은 종종 세속적인 욕망과 중첩된다. 돈을 중심으로 세속적인 조건들이 충족될 때, 우리는 ‘마침내’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폭력으로 얼룩진 사랑도 부지기수다. 꼭 범죄로 규정된 데이트 폭력이 아니어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수많은 폭력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하고 시작되는 끊임없는 요구들, 강요들, 통제들. 이제는 아예 사랑을 쉽게 포기한다. 왜냐하면 관계는 비생산적이니까, 시간과 돈, 감정의 낭비니까. 각박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안개 같은 사랑보다는 확실한 자기계발과 스펙 쌓기에 힘을 쏟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해 보이는 이유다.

과거의 나는 사랑만이 인간을 이기심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할 때조차도 너무나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다. 자신의 상처만 아픈 사람들, 그래서 타인의 상처에 눈감고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람들. 과연 인간은 나의 상처보다 타인의 상처에 아파할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은 ‘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서래의 사랑은 어쩌면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작은 희망을 보여준다.



윤선경 한국외국어대 영어통번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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