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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뜻밖의 말들

opinionX 2022. 7. 14. 10:42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저렇게 물었으나 걸어서 왔는지, 차를 타고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는지도 알 바 아니다. 지금은 내 눈앞에 상대가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문득 생각나서. 생각이 나서 왔지.” 방문자는 천천히 대답한다. 그제야 마음에 평정이 깃든다. 용건은 다름 아닌 그리움이었다.

마음이 다친 날에는 종종 저 장면을 떠올리곤 한다. “생각이 나서 왔지”라고 차분하게 말했던 사람의 표정을 그려본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응어리가 눈 녹듯 풀어지는 것이다. 문득 생각이 날 수는 있다. 생각이 났다고 가볍게 문자를 보내거나 애틋한 편지를 쓸 수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생각난 사람을 보러 가기는 쉽지 않다. 문 밖으로 나가거나 옆 동네를 산책하는 데에도 어떤 결심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물며 자신이 사는 곳과 동떨어진 지역을 계획 없이 이동하는 일은 여간해선 실행으로 옮기기 어렵다.

당시 내가 했던 말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였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 가져다준 커다란 기쁨과 놀라움에 빗대기에는 ‘감동’이라는 단어가 뭔가 모자란다고 느꼈다. 그날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던 순간의 기척, 생각이 나서 왔다고 담담하게 말할 때의 표정만큼은 생생하다. 웃고 떠들며 먹고 마셨던 것들은 이미 어떤 식으로든 소화되었겠지만, 나는 무너질 것 같을 때마다 단단한 벽이 되어주었던 한마디의 말을 발음해보는 것이다. “생각이 나서 왔지.” 저 말 덕분에 그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뜻밖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위의 경험으로 인해 나는 뜻밖의 일을 오롯이, 그리고 올곧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뜻밖의 지시나 요청에도 예전보다 동요하지 않게 되었는데, 뜻밖의 시련을 이겨내면 뜻밖의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득 생각이 나서 나를 찾아준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예기치 않은 장면 앞에서 얼어붙기 일쑤였을 것이다. ‘뜻’의 ‘밖’에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내 소관은 아니지만, 뜻밖의 일을 내 안에 들일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몫이다.

천만뜻밖의 말에서 인생의 앞길이 열리기도 한다. 열두세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난생 처음 “너는 말을 다르게 해”라는 말을 들었다. 듣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는데, 속에 없는 말을 했다는 뜻으로 친구의 말을 해석해서였다. 내 반응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친구가 황급히 덧붙였다.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게 한다고. 네 방식으로, 독특하게, 재미있게.”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말하는 데 재미를 붙인 것은. 말하는 데 붙인 재미가 대화의 환희에 가닿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나는 묻고 듣고 말하고 끼어들고 틈틈이 추임새를 넣고 농담을 던지고 대화의 말미에 오늘 나눈 것들을 정리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시인이지만 밖에서는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소개하기도 한다.

뜻밖의 말에 대해 생각한다. 예상을 벗어난 말, 처음 들었을 때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말, 해석에 골몰하게 만드는 말, 또는 듣자마자 가슴을 요동치게 만드는 말, 힘든 순간마다 꺼내서 기대고 싶은 말, 의지가 반영되지 않았기에 생경하지만 순순히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의지를 다잡게 되는 말. 어쩌면 상대는 생각이 나서 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들은 사람은 북받치듯 생각나는 그런 말.

뜻밖의 어떤 말은 난데없이 들이닥쳐 사람을 때려눕힌다. 뜻밖의 어떤 말은 사람을 감싸 안으며 마침내 살리기도 한다. 메마른 땅에 불을 지피는 뜻밖의 말도 있다. 200자 원고지에 처음으로 글을 써 갔을 때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별난 글이네.” 뜻밖의 말 덕분에 나는 쓰는 사람이 되었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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