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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또다시 변모하는 산업사회의 현실을 농경제 시대의 대의제 민주주의 틀에 쑤셔 넣는 답답한 상황에 봉착하였다
산업사회 현실을 생생하게 파악하고 반영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를 마련하고 여기에 기존의 국가 권력을 과감히 위임해야 한다
그것이 현재의 답답한 상황을 뚫기 위한 절실한 과제이자,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간절한 포괄적인 의미의 정치 혁신이다



영화 <300>을 보면 레오니다스 왕의 지휘 아래에 똘똘 뭉친 스파르타 전사 300명이 좁은 길목을 막고서 수십 만 페르시아 대군의 진군을 저지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좀 뒤틀린 상상력일지 모르지만, 더 효율적이고 더 평등한 산업사회로 나아가야 할 우리 모두의 발걸음이 여의도 입법자 300명의 손에 오롯이 달려있는 우리 처지와 묘하게 닮은 점이 있다. 아무리 절박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해도, 이 300명이 움직이고 합의해주지 않으면 제대로 변화를 만들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 의회 민주주의의 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어쩌다 ‘300’이라는 숫자가 일치해서 그런 것뿐, 사실 전 세계 모든 선진 산업국들이 비슷하게 부닥쳐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지금까지의 비판은 주로 그것으로는 국민들 모두의 뜻 그리고 집단적인 일반의지를 제대로 대표할 수 없다는 직접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이루어져왔다. 하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질문을 던질 때가 되었다. ‘농경제 시대에 생겨난 대의제 민주주의로 현대 산업사회의 효율성과 평등을 달성할 수 있는가’이다.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망각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농경제 사회 그것도 실제로 존재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이상화된’ 농경제 사회를 모델로 하여 생겨난 틀이다. 반쯤은 전설 속에 가려진 로마 공화정의 원로원, 민회, 집정관 등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심지어 그 존재 이유의 논리도 거의 비슷하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18세기에 나타난 계몽주의 정치철학과 미국 및 프랑스의 혁명 경험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라. 그리고 이 시점이 하필이면 인류의 진화사에서 산업 문명이 나타나기 직전의 시점이었다는 아이러니도 주목하라. 

대의제 민주주의는 선거로 뽑힌 ‘300명’이 국민 모두의 뜻을 그대로 대표한다는 일종의 ‘작업상의 허구’ 위에 서 있다. 그리하여 이 ‘300명’은 법을 제정하는 주권자의 권리를 오롯이 손에 쥐게 되며, 이것이 법의 지배라는 원리와 결합되면서 국가기구 전체 나아가 사회 전체가 이 300명이 정한 법률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엄청난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그 ‘작업상의 허구’가 탄탄하게 성립하려면 모든 국민들이 재산, 소득, 직업, 성별, 학력 등등에서 아무런 차별성이 없는 동일한 존재라는 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정전제를 꿈꾸던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들처럼, 모두가 자기 땅을 가지고 열심히 농사지어 자급자족으로 독립성을 유지하며 고상하게 살아가는 공화정을 꿈꾼 키케로의 이상 속에서는 성립 가능한 전제일 수 있다. 하지만 산업사회의 현실은 이와 하늘과 땅만큼이나 거리가 멀다. 모든 이들은 재산, 소득, 직업, 성별, 학력 등에 따라 산업사회의 작동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천차만별로 찢어지게 되어 있으며, ‘선 자리가 달라지면 풍경이 달라지듯이’, 각자가 처한 문제들도 또 각자가 바라보는 사회 전체의 문제도 모두 달라지게 된다.

‘대의제 민주주의’ 시대와 괴리

이러한 괴리를 가장 먼저 간파한 한 사상가가 카를 마르크스였다. 그는 프랑스혁명 당시의 정치이론이 전제로 하고 있는 ‘국민의 추상적 동질성’이 19세기 산업사회의 현실과 날카롭게 모순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지배적인 현실은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양대 계급으로 사회가 찢어지고 있는 사태이며, 따라서 18세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종류의 정치철학과 민주주의 형태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었다. 이러한 인식이 20세기 초 널리 확산되면서 현실 정치에서도 중대한 진전이 나타났다. 2차 대전 이후 대부분 산업국가의 의회는 노동 쪽과 자본 쪽을 대변하는 두 정치 세력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이러한 정당 구도는 다시 산업 관계에서의 노동조합과 경영자 연합과 각각 연결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의제 민주주의 또한 농경제 사회의 흔적을 많이 걷어내고, 산업사회에 맞는 모습으로 업데이트될 수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의 이른바 ‘포스트인더스트리얼’의 시대가 오면서 산업과 사회에서는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능적 분화가 심화되고 복잡성도 더해가는 현실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니 이러한 21세기의 산업사회를 노동과 자본이라는 양분법으로 접근하는 것은 농경제 사회로 접근하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 없이 비현실적인 일이 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노동·자본 양대 구도에 기대는 20세기형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다시 현실에 뒤떨어지는 틀로 전락하게 된다. 아직까지 이러한 도전에 맞는 정치 혁신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고, 21세기에 들어서면 아예 민주주의 자체가 위협을 당하는 ‘포스트민주주의’의 나락으로 떨어져가고 있다.  

2020년대 전 인류에게 닥친 가장 큰 도전이 산업사회의 환골탈태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숨 가쁜 기술 및 산업 전환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생태위기에 휩싸이고 불평등과 각종 사회갈등으로 찢어진 산업 문명을 어떻게 다시 설계해야 최고의 효율성 그리고 평등 및 정의를 함께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핵심 질문이 되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산업사회 곳곳의 아주 세세한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가운데에서도 아주 큰 차원에서 사회가 나아갈 기본 원리와 방향을 제시하고 이에 따라 외교, 사회, 문화, 교육 등 동떨어져 보이는 영역들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어마어마한 작업을 필요로 한다. 어느 천재적 개인의 역량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닐뿐더러 20세기처럼 ‘모든 질문에 답을 주는’ 식의 이념과 사상을 붙잡는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기능적·사회적·문화적 논리에 따라 극도로 세분화·파편화된 사회 곳곳의 사람들이 모두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의견과 지혜를 내놓고, 이에 대한 종합적 토론이 이루어지면서 집단적 합의가 형성되는 과정만이 이 과제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기능적 차원’의 분권 생각해 볼 때

현존하는 ‘300’의 의회는 과연 이런 과제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이는 의원 개개인의 역량 및 도덕성과 별개의 문제이다. 이런 질문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선 가능성도 확보해야 하며, 소속 정당의 온갖 정치 논리까지 떠안아 행동해야 하는 것이 이 ‘300’명의 처지이다. 이것저것 다 고민하여 행동하기에는 시간도 자원도 턱없이 부족한 ‘300’명이다. 결국 현실에서는 아주 힘있고 목소리가 큰 집단의 입법 요구를 그냥 받아주는 ‘심부름꾼’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사회 전체에 절실한 입법 요구에 전혀 모르쇠로 반응하기도 하고, 심지어 천신만고 끝에 올라온 법안을 순전히 정치적·당파적 이유에서 틀어버리는 ‘비토크라시’의 첨병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틀을 운명처럼 둘러쓰고 있는 우리 사회는 아무리 화가 치솟고 울화통이 터져도 이 ‘300’명의 재가를 받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으니, 결국 꾹 참고 이 병목의 정치권을 달래고 어르지 않을 수 없는 신세이다.  

이러한 답답한 상황을 뚫기 위해 절실한 과제가 포괄적인 의미의 정치 혁신이다. 이는 능력에 비해 과중한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는 기존 국가의 권력을 ‘산업사회의 현실에 맞도록’ 지역에 따라, 기능에 따라 과감하게 분권화하여 당사자들에게 위임하는 일이 된다. 지역 정치로의 분권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기능적 차원’에서의 분권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보인다. 

아이디어나 외국 사례로만 보아도 이미 참고할 만한 많은 예들이 있다. 산업 관계의 미묘한 특성을 충분히 반영할 수 있도록 노동 문제의 법적 판단을 전담하는 노동 재판소를 따로 설치하자. 산업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숙의할 수 있는 전문가들의 각종 위원회를 만드는 것은 좋지만, 말만 무성할 뿐 현실에서는 아무런 힘도 없이 그저 상징적인 모양만 과시하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산하의 위원회가 아니라 스웨덴 등처럼 국회에서의 입법권과 연결되는 실질적인 힘을 가진 위원회로 재편하자. 교육 특히 고등교육의 재편을 두고 기업, 시민사회, 교육 종사자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여 의사를 반영할 수 있도록 교육부서와 교육청 체계를 재편하자 등등. 

20세기 중반처럼, 또다시 우리는 변모하는 산업사회의 현실을 농경제 시대의 대의제 민주주의 틀에 쑤셔 넣어야 하는 답답한 상황에 봉착하였다. 산업사회의 현실을 생생하게 파악하고 반영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를 마련하고 여기에 기존의 국가 권력을 과감히 위임한다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간절한 정치 혁신이다.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대안적 사회의 정치경제 질서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연구와 활동을 병행해 왔다.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을 지냈으며, 국제칼폴라니 연구협회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위기 이후의 경제학> <비그포르스, 잠정적 유토피아와 복지국가>가 있으며, 역서로는 <도넛 경제학> <21세기 기본소득> <균형재정은 틀렸다: 현대화폐이론 입문> 등이 있다.


<홍기빈 정치경제학자>

 

 

연재 | 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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