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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참 이상한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도 이상해질 때가 있다. 일상의 사물은 표면의 일부만 슬쩍 보여주면서 제 비밀을 털어놓을 상대를 늘 기다리고 있다. 주말 농사에 열심인 친구가 모둠전을 앞에 두고 한마디 했다. 이상해, 밭일하다가 호박을 만나면 유독 기분이 움푹 깊어져. 그땐 달리기에 막 빠져서 그랬을까. 그 말을 듣는데 문득 텃밭이 육상시합이 벌어지는 운동장, 그중에서도 호박은 줄기 따라 뛰어가는 마라톤 선수 같다는 상상을 했다.

그 무렵 잠실에서 출발하여 송파 일대를 달리는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호기롭게 시작하였으나 이내 기진맥진, 어느 교차로에서 길이 갈렸다. 풀코스는 좌회전, 하프코스는 우회전. 나는 경험하지 못할 경지를 향해 뛰어가는 선수들의 등을 바라보는데 왠지 눈시울이 좀 뜨거워졌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내 경의의 한 표시였다. 겨우겨우 달려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 완주했다. 근육은 모두 흘러내리고 뼈마디로 걷는 듯 힘든 몸을 추스르는데 가까이에서 함성이 터졌다.

그랬다. 이날 대회의 한 행사로 국민 마라토너의 결혼식이 진행된 것이다. 늘 혼자 뛰다가 말쑥하게 차려입고 둘이 걷는 우리의 봉달이, 이봉주 선수가 신랑이었다. 마라톤 중계방송이라면 빼놓지 않고 보던 나는 이 선수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부터 그냥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날 뜻밖의 하객이 되어서 응원과 축하의 박수를 힘껏 쳤다.

편을 나누는 것도, 공을 다투는 것도 아닌 마라톤은 어쩌면 지구라는 큰 공을 혼자 드리블해야 하는 고독한 경기이다. 온통 축구뉴스로 도배된 가운데 이봉주 선수가 올해의 국민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희귀병으로 투병 중임에도 가문의 영광이라는 소감을 울먹이며 전한 뒤 힘겹게 단상을 내려가는 모습이 잠깐 비춰졌다. 인생의 서술어로 탁구나 축구처럼 구기종목을 선택하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간다. 아무래도 인생은 마라톤! 나만의 보폭으로 홀로 견디며 뛰어가는 것. 단하의 자리로 돌아가는 선수의 굽은 등은 뭔가 맺어지기 직전의 큰 열매인 것 같았다. 환희에 차서 달렸던 올림픽주경기장의 트랙을 닮은 것도 같아서 20년 전처럼 눈시울이 또다시 몹시 뜨거워졌다.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연재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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