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산속의 겨울밤은 길고도 춥다. 우리 조상들이 그 긴 겨울밤에 얼어 죽지 않고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아궁이 온돌 덕분이 아닌가 한다. 지금이야 번거로운 아궁이 온돌을 사용하는 집이 거의 없지만 전통방식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장작 마련은 가장 큰 겨울철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사는 곳에 아궁이를 갖춘 황토방이 두 채 있다. 초겨울에 장작을 아무리 많이 해놓아도 손님들이 한번 왔다 가면 그 많던 장작이 순식간에 없어지곤 한다. 불을 땔 줄 모르는 데다 온돌방 하면 무조건 지글지글 끓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이다. 한번은 하도 불을 때는 바람에 한쪽 벽을 태워먹은 적도 있다. 올겨울은 발목을 붙들고 있는 일이 있어 미처 장작을 마련하지 못해 하는 수 없이 생솔가지를 때며 추위를 견디고 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나뭇가지로 두꺼운 방구들을 데우는 일은 만만치 않은 미션이다. 초보자에게 이 일을 맡기면 불도 못 붙이고 연기만 잔뜩 마시다가 뛰쳐나온다.
우선 작은 톱을 들고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여름에 눈여겨보았던 나무들의 가지를 정리해준다. 말하자면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다. 불 때는 일도 재미있지만 나는 가지치기가 더 흥분된다. 이 나뭇가지를 가지고 좋아하는 불때기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흥분되고, 답답했던 나무속을 시원하게 정리해 줌으로써 좋아라 할 나무를 생각하니 즐거워진다.
무릇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은 그 일을 함으로써 너도 좋고 나도 좋을 경우에 발생한다. 나만 좋은 일에 매달리면 결국은 모두를 망치고 만다.
이제 가져온 나뭇가지들을 뚝뚝 분질러 아궁이에 넣고 때면 상황 끝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렇게 불을 때면 방도 못 데우고 한순간에 나뭇가지들을 다 태우고 나서 “역시 통나무 장작이 필요해!” 하며 그동안의 헛수고를 탓하게 된다.
누구나 생나뭇가지를 태워 방을 데울 수 있다면 장작 장수가 생겨날 리가 없다. 사전 준비물이 필요하다. 전지가위와 불쏘시개다. 가지치기를 할 때 불쏘시개로 쓸 잘 마른 삭정이도 빠짐없이 챙겨야함은 물론이다. 먼저 전지가위로 나뭇가지를 적당한 크기로 해체해야 한다. 나는 이 과정을 몹시 좋아한다. 어떤 때는 전지가위 하나로 커다란 나무를 해체하면서 장자에 나오는 신기의 해체 기술자 ‘포정’을 떠올리기도 한다.
나무를 다 해체하면 굵기 순으로 가지런히 늘어놓는다. 소나무밭에서 가지치기를 하면 당연히 솔잎이 가장 많이 쌓인다. 일부는 태우고 일부는 방으로 가져가 마대자루에 넣어 쿠션으로 쓰거나 이부자리 밑에 깔고 잔다. 일종의 ‘솔잎 테라피’다. 삭정이로 불을 붙인 뒤 잔가지 위주로 불을 키운다. 불길이 커지는 정도에 따라 얹는 나뭇가지의 굵기도 굵어진다. 그렇다고 꼭 잔가지에서 굵은 나뭇가지 순서로 얹는 건 아니다. 불꽃의 모양과 세기, 나뭇가지의 위치와 간격에 따라 딱 맞는 나뭇가지를 찾아 넣어준다. 어떤 때는 살포시 얹어 놓는가 하면 어떤 때는 벌어진 틈에 꽂아 넣기도 하며, 빈 공간에 밀어 넣기도 한다.
이 과정이 정확히 진행되면 자신이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음악이 클라이맥스에 오르면 온 에너지가 한순간에 폭발하듯이 작은 나뭇가지에 붙은 불들이 잘 어우러지면 곁에 붙어 있기 힘들 정도의 화력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런 무시무시한 화력을 만들어내는 건 순전히 지휘자의 능력에 달려 있다.
한국 붉은 소나무 _ 국립수목원 제공
가장 굵은 나무를 얹었다고 일이 끝난 게 아니다. 생나무는 잘 안 타기 때문에 나무의 물기가 완전히 빠질 때까지 불쏘시개를 적절히 대주어야 한다. 대부분의 생나무는 절단면에서 수지를 뚝뚝 흘리며 탄다. 수지에는 물과 함께 어느 정도의 휘발성 물질이 섞여 있어 한편으로는 불이 잘 붙게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통나무 이상으로 오랫동안 불꽃을 견디게 한다. 때문에 생나무도 잘만 불을 붙여 놓으면 방을 데울 수 있는 것이다.
보통은 가장 굵은 나뭇가지를 얹어 놓고 불문을 닫는다. 만약 남은 불심을 한 번 더 활용하고 싶다면 마지막에 솔잎을 넣는다. 솔잎을 어중간한 불속에 넣으면 산소 공급을 차단하여 연기만 엄청나게 난다. 굵은 나무의 불길이 정점을 지나 잉걸불로 옮아갈 때가 적기다. 이때 솔잎을 넣으면 잉걸불이 폭죽처럼 터지면서 화려한 불꽃쇼를 감상할 수 있다. 매일 삼십분씩 이런 식으로 불을 때주면 약간의 생솔가지만 가지고도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다.
돈 주고 산 장작을 켜켜이 쌓아놓고 가스토치로 불을 붙이는 것은 편리와 효율만 따지는 산업문명의 소산이다. ‘흙과 문명’을 테마로 글을 쓴다고 해놓고 황토방 불 때는 모습을 시시콜콜 늘어놓는 이유는 그 속에 ‘흙의 문명’의 정수가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공생, 순환, 재활용, 느림, 조화, 균형, 협동, 지속성, 자연회귀 등이 그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려면 정치가 변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문명단위에서 보면 정치가 어떻게 바뀌든 ‘나의 삶’에 변화는 없다. 그저 권력집단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옮겨 갈 뿐이다.
먹고살기도 힘들고 현실정치를 따라잡기도 버거운데 문명 어쩌고 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냐고도 한다. 그런 얘기를 하기 전에 우리가 이미 ‘무리한 세상’에 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문명 자체가 무리한 세상을 만들어냈고 그 속에서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새로운 세상을 원한다면 정치가 아니라 문명을 얘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잡한 논의는 시간을 두고 풀어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세상의 변화는 내 삶의 변화”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상의 차원에서.
황대권 | 생명평화마을대표
'일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설]선진화법 개정안 상정하고 부결시킨 여당의 희한한 수법 (0) | 2016.01.19 |
---|---|
[경향의 눈]‘혼이 비정상’인 관료에게 살림 맡겨야 하는 국민 (0) | 2016.01.18 |
[여적]우주의 백일홍 (0) | 2016.01.18 |
[기고]시대의 스승, 리영희와 신영복 (0) | 2016.01.18 |
[사설]‘시대의 스승’ 신영복 선생의 타계와 ‘연대의 가치’ (0) | 2016.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