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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잠재력 확충을 위한 구조개혁과 경제회복의 성과가 서민생활 안정으로 연결되도록 하는 데에 경제정책의 중점을 두고, 일자리 창출, 경제선진화, 대외역량 강화와 국격 제고 등 목표로 선정’(2010년)
‘내수·수출 균형을 통한 경제활성화, 창조경제·문화융성을 통한 성장동력 확충, 청년 일자리 창출 및 맞춤형 복지 등을 추진’(2016년)
한국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가 해마다 내놓는 업무보고의 주요 내용이다. 사례로 든 세 차례 업무보고를 받은 이는 각각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이었는데,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2006년 업무보고를 올해 그대로 반복해도 어색하지 않다. 일자리 창출과 성장동력, 복지에 대한 언급은 10년 전에도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였다. 한국경제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으며, 업무보고는 전에 썼던 틀에 몇 개 문구만 고쳐 넣는 식의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기재부 경제관료는 한국 공무원 중 최고 엘리트 집단이다. 명문대를 나와 어려운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이들이다. 고위직으로 갈수록 해외에서 석·박사 학위를 딴 유학파가 수두룩하다. 하지만 기재부 업무보고만 놓고 보면, 대학 중간고사 때 선배들이 물려준 ‘족보’를 달달 외워 적당히 윤색한 맞춤형 답안지를 보는 듯하다.
대통령이나 장관이 바뀌면 경제정책도 바뀌기 마련이다.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실무 경제관료들이다. 사실 권력쟁취에만 몰두하는 한국 정당의 정책수립 능력은 크게 떨어진다. 대선이나 총선을 앞두고 공약을 급조하는 게 보통이다. ‘국민을 잘살게 하는 것’이라는 명분은 있어도 구체적 실행계획은 마련하기 어려워 공약을 만들 때면 은밀하게 경제관료의 도움을 받는다. 그렇게 유능한 경제관료들이 왜 매년 업무보고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무능과 무소신의 전형으로 비치는 걸까.
이명박 정부에서 경제수장을 지낸 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은 대표적인 엘리트 경제관료였다. 그는 취임 때 “공무원들에게 영혼이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데 비애를 느낀다”면서 소신을 갖고 정책을 추진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듬해 고용창출 중소기업 감세에 거세게 반대하던 기재부는 결국 청와대의 압력에 밀려 찬성으로 돌아섰다. 국회에서 “입장이 급선회한 내막이 있느냐”는 질문에 윤 장관은 “그래서 공무원은 혼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한 행사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_연합뉴스
어려서부터 부모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한 덕분인지 경제관료는 위에서 지시한 것은 철저하게 따른다. ‘증세 없는 복지’에 대해 사석에서는 ‘어림없는 소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숫자를 이리저리 꿰맞추며 묵묵하게 일한다. ‘지방에 센터 몇 개 짓는다고 창조경제가 되겠느냐’면서 불만을 토로하고는 모든 시·도에 창조경제혁신센터라는 걸 뚝딱 만들었다. 실패할 확률이 높고 나중에 큰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 정책이라고 해도 이행한다. 5년 단임제 시한부 대통령은 정책의 지속 가능성이나 일관성에 관심이 없다. 임기 중 보여줄 성과에만 집착할 뿐이고, 경제관료가 충실하게 뒷받침한다.
첫발을 내디딜 때는 국가경제 발전이나 국민생활 향상 등 긍지를 염두에 뒀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경제관료의 관심은 보상에만 쏠려 있다. 연초에 퇴임한 최경환 전 부총리는 재임 중 가계부채 급증과 전·월셋값 폭등, 경기침체 심화 등 경제정책 실패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 기재부 직원들로부터 2년 연속 ‘닮고 싶은 상사’ 1위에 올랐다. 이유는 대통령의 최측근 수장으로서 보상에 후했기 때문이다. 최 전 부총리 취임 이후 기재부 출신 4명이 장관에 올랐고, 5명은 차관 자리를 꿰차 ‘기재부 전성시대’라는 말마저 나온다. 장차관 아래 승진 인사도 연쇄적으로 이어졌으니 최고의 보상이었다. 기재부 고위직 승진은 곧 퇴임 후 고액 연봉을 받는 민간 기업·단체로 옮겨갈 수 있는 보험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교과서 논란과 관련해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경제관료 역시 혼이 없는 사람들이니 경제를 바로 세우기 어렵다. 그들이 혼 없는 비정상으로 전락한 것은 스스로의 선택이라기보다 정권이 무능해 긍지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제관료가 정책에 영혼을 담아 추진한다면 한국경제는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다. 한국의 경제관료는 누구보다 유능하다고 자부하는 최고 엘리트 아닌가.
안호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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