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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2월7일 치러진 전기 중학 입학시험에 나온 자연과목 문제 가운데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항이 있었다. 정답은 디아스타아제였다. 그런데 일부 학부모들이 문제의 보기로 나온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녀가 이 문제를 틀려 시험에 떨어진 이 학부모들은 서울고등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와 시위도 했다. 결국 디아스타아제와 무즙 둘 다 정답이라는 판결이 나왔고 무즙으로 정답을 써서 시험에 떨어진 학생 38명은 경기중학교에 재입학했다. 이 파동으로 당시 서울시 교육감 등 8명이 사표를 냈다.

일명 ‘무즙 파동’이다. 이는 해방과 한국 전쟁 이후 입시경쟁이 얼마나 과열됐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다. 무즙 파동이 일어난 지 3년 뒤 같은 입시에선 ‘창칼 파동’도 일어났다. 미술 문제 중 “목판화를 새길 때 창칼을 바르게 쓰고 있는 그림은 어느 것인가”라는 문항이 출제됐는데 경기·서울중학교 낙방생 학부모 549명은 정답이 두 개라며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 사안은 무즙 파동과 다르게 패소했고 낙방생들은 불합격 처리됐다.

공정사회를 위한 국민모임 회원들이 3일 서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대학입시와 관련해 정시 45% 확대와 수능상대평가 도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최근 ‘정시 30% 확대’를 골자로 한 2022학년도 대입제도개편안 발표를 지켜보면서 이 두 개의 사건이 머리에 떠올랐다. ‘무즙 파동’과 ‘창칼 파동’은 문제 하나로 상급학교의 당락이 결정되고, 합격하면 인생이 달라지는 우리 사회의 씁쓸함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서열화된 중학교 입시경쟁은 치열하다 못해 살벌해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극심한 과외공부에 시달렸다. 1967년 부산에선 5학년 초등학생이 밤 10시 즈음 과외공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 사회적 반향이 컸다고 한다.

지난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설 때만 해도 여러 면에서 사회적 변화가 있지 않을까 많은 이들이 기대했다. 특히 교육 문제와 관련해 새 정부는 학생 줄 세우기로 대표되는 수능의 폐해를 없애고자 모든 과목을 절대평가하고 학교 수업은 고교학점제를 임기 내 시행해 토론 수업을 안착시키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이제 아이들은 보수정권 시절보다 더한 입시경쟁에 내몰리게 됐다. 입시 변별력과 공정성을 높이라는 일부 여론을 받아들여 점차 감소하던 정시비율을 다시 확대키로 했기 때문이다.

전국 198개 대학 중 교육부의 정시 확대 권고를 받는 대상은 35개로 최상위 학교가 대부분 포함돼 있다. 이 대학들이 정시를 30%로 늘릴 경우 총 5354명이 수능 전형으로 추가 입학하게 된다. 2022년 대학 입학정원 41만여명 중 1.2%에 해당되는 수치다.

1.2%에 포함되는 이들은 누구일까. 교육현장과 입시학원가에선 그동안 내신의 불리함을 호소하며 정시 확대를 요구해온 외고·자사고 등 특목고 학생들이 절대적인 수혜자가 됐다고 입을 모은다. 사교육 중심지인 강남 지역의 학교들도 마찬가지다. 공교롭게도 교육부가 국가교육회의 권고안에 따라 정시 비율을 확대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진 이달부터 서울의 아파트 값은 강남을 중심으로 다시 폭등하고 있다. 한국에서 대학 입시가 갖는 의미에 대해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누가 (개천에서) 용이 될 것인가를 가려내는 선발 수단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시가 확대되면 앞으론 과거와 달리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경우도 잘 볼 수 없을 것 같다. 그나마 학생부종합전형(수시)일 때에는 공부는 다소 못해도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게 확실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정시 확대 기조 속에선 이마저도 어렵기 때문이다.

1년 만에 정책 기조가 180도 바뀐 부분에 대해 설명 한마디 없는 청와대와 정부를 향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의 눈엔 1.2%를 뺀 98.8%의 학생들은 더 이상 학생들로 보이지 않는 듯하다.

<문주영 정책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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